영국 제조업의 자존심으로 꼽히는 가전업체 다이슨이 본사를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로 이전한다. 다이슨은 22일(현지 시각) 작년 실적 발표를 통해 "최고경영자(CEO)인 짐 로완(Rowan)과 최고재무책임자(CFO), 글로벌 사업 대표, 법무 총괄 대표 등이 싱가포르에 거점을 둘 것"이라며 "차세대 사업인 전기차 사업 총괄도 싱가포르에서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존 주력 사업은 물론이고 미래 사업까지 모두 싱가포르로 거점을 옮기겠다는 것이다.

영국의 발명왕 다이슨, 싱가포르로 이사갑니다 - 가전에 이어 전기차 시장 진출을 선언한 다이슨의 창업자이자 최고 엔지니어인 제임스 다이슨이 자동차 내부를 훤히 드러낸 모형에 앉아 있는 모습. 영국 제조업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다이슨은 본사를 영국에서 싱가포르로 옮긴다고 22일 밝혔다. 영국에서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했던 다이슨이 영국을 배신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영국 산업계는 다이슨의 본사 이전 발표에 발칵 뒤집어졌다. 다이슨은 영국을 대표했던 반도체 설계 업체인 ARM과 자동차 업체인 재규어 랜드로버가 각각 일본 소프트뱅크, 인도 타타자동차에 매각되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남은 기업이다. 그런 다이슨마저 본사를 영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전하면 영국의 제조업 기반이 사실상 사라지는 셈이다. IT(정보기술) 업계에서는 "합의 없는 상태에서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no deal Brexit)' 우려로 다이슨이 해외로 나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노딜 브렉시트 우려 VS 아시아 중요성 때문

다이슨은 급성장하는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본사를 옮기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이슨의 주력 제품인 고가(高價) 청소기, 날개 없는 선풍기, 헤어드라이어는 중국·한국·일본 등 아시아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작년 매출 44억파운드(약 6조4000억원) 중 절반 이상이 아시아 시장에서 나왔다. 반면 영국에서 벌어들인 매출은 4% 남짓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다이슨은 자사의 모터·배터리 기술력을 활용한 미래 주력 사업인 전기차 공장도 싱가포르에 짓고 있다. 다이슨은 2020년 싱가포르의 전기차 공장을 완공하고 2021년부터 양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다이슨의 짐 로완 CEO는 "이번 결정은 회사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다이슨은 영국 최고의 성공 스토리를 쓴 회사로 유명하지만 앞으로는 세계적인 기술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IT·가전 업계에서는 다이슨의 본사 이전은 '노딜 브렉시트'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영국 의회가 지난 15일 브렉시트 합의안을 부결시키면서 EU(유럽연합)와 별도 합의 없이 3월 29일 곧바로 브렉시트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영국은 EU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과 별도로 관세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반면 싱가포르는 작년 10월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다이슨 입장에서는 싱가포르로 옮기는 것이 브렉시트 후폭풍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이슨 측은 "브렉시트 때문에 본사를 이전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영국의 법인세율은 19%, 싱가포르는 17%이기 때문에 절세 효과도 극히 미미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해석은 상속세 절세 목적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영국은 상속세가 40%에 달하는 반면 싱가포르는 양도소득세와 상속세가 없다"고 보도했다. 올해 71세인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이 자신의 지분을 자녀들에게 상속할 경우 싱가포르가 더 유리하다는 해석이다.

◇들끓는 영국, "다이슨은 위선자다"

영국 내부에서는 제임스 다이슨 창업자가 강경한 브렉시트 지지자라는 점에서 더욱 거센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는 "영국과 EU 사이의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감안해보면 브렉시트가 영국을 위한 올바른 결정이다"라고 주장해왔다. 이처럼 브렉시트를 강력 지지해왔던 다이슨이 갑자기 본사를 이전하자 "위선자" "배신자"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훈장까지 받았는데… - 2016년 7월 영국 버킹검궁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다이슨의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왼쪽).

영국 보수당의 샘 기마(Gyimah) 의원은 "그는 브렉시트를 지지해왔던 영국인들의 신뢰를 배신했다"고 밝혔다. 영국 노동당의 조 스티븐스 의원은 "브렉시트의 최대 지지자였던 제임스 다이슨이 영국 본사를 싱가포르로 이전하기로 한 것은 그의 뻔뻔한 위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번 결정은 다이슨을 영국의 대표 창업가이자 발명가로 생각하고 있는 영국 정부와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