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현지 시각) 야당인 노동당이 제출해 영국 하원에서 진행된 테리사 메이 총리 불신임안이 찬성 306표, 반대 325표로 부결됐다.
의회는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방안을 230표(찬성 202표, 반대 432표)라는 사상 최대 표차로 퇴짜를 놓으며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고는, 하루 뒤엔 그를 불신임 위기에서 건져올렸다.
이날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총리가 제출한 (괴물 같은) 프랑켄슈타인 딜(deal)은 죽었고 좀비 정부는 통치 능력을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의원들은 메이 총리를 재신임했다. 이에 따라 메이 총리는 21일까지 '플랜 B' 브렉시트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의회는 29일 표결할 예정이다. EU 지도부도 기존 합의안이 영국 의회에서 부결되자, 오는 3월 29일로 예정된 브렉시트 발동 시점을 2020년까지 연기하는 방안도 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더 타임스는 보도했다.
전날과 달리 이날 투표는 철저하게 당파를 따라 이뤄졌다. 보수당 내 '강경 브렉시트파' 의원들과 의회에서 보수당과 함께 행동하는 북아일랜드 기반의 민주연합당(DUP) 의원들은 메이의 브렉시트안에는 '반대' 몰표를 던졌지만 이날은 모두 총리를 지지했다. 반대 325표는 투표 참여 보수당 의원 314표 전체와 연정 대상인 DUP 10표, 무소속 1표를 합친 것이다. 한 표의 이탈도 없었다.
정부 불신임 이후, 혹시라도 총선에서 야당 노동당이 집권할 가능성을 두려워한 것이다. 바로 24시간 전까지 메이를 죽이려고 했던 보수당 내 각 정파 의원들이 이렇게 똘똘 뭉친 모습에 영국 언론은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불신임안 찬반 토론에서 코빈 노동당 대표는 "브렉시트안 부결 표차가 영국 의회 사상 최대"라며 "의회는 여왕의 현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포문(砲門)을 열었다. 또 다른 야당인 스코틀랜드민족당(SNP) 스튜어트 맥도널드 의원은 "총리는 질문을 받아도 몸속에 있는 로봇이 작동하면서 그간 되풀이해 온 대본에만 매달린다"고 비아냥댔다. 메이 총리는 로봇같이 어색한 연설 모습으로 '메이봇(Maybot)'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러자 보수당 의원들은 일제히 '메이 구하기'에 나섰다. 가장 극적인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메이의 당내 반대파인 '유럽연구그룹(ERG)' 부대표인 마크 프랑수아 의원이었다. 그는 전날 브렉시트안에 반대표를 던졌던 인물이다. 작년 12월엔 메이를 겨냥해 당 대표 불신임 투표까지 주도했다. 그랬던 프랑수아 의원이 이날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수당원"이라며 "투표 시작 벨이 울리면 ERG 의원 전체는 총리와 같은 방(lobby)으로 걸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의회에선 찬성과 반대 투표 하는 방이 분리돼 있다. 평소 "확실히 실패한 메이 총리를 용기 있게 바꾸자"던 보수당의 스티브 베이커 의원도 "메이가 성공적으로 EU 탈퇴를 이끌어내면 지금이라도 역대 최고의 총리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다른 보수당 의원들도 언론에 "총리는 애국자, 의무의 화신(化身)이자 나라의 종복" "영감 있는 지도력"이라며 메이를 칭송했다.
보수당 의원들은 거꾸로 코빈 대표를 겨냥해 "늘 (경제·복지 등에 대해) '하락했다(down)'는 말만 하는데 그렇게 나라와 국민에 확신도 없이 총리가 되려 하느냐" "한때 위대했던 정당을 수치스럽게 만든 절망적인 지도자" "뻔뻔한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심지어 한 보수당 의원은 토론 뒤 인터뷰에서 수많은 성행위 체위(position)를 다룬 인도의 고대 성전(性典) 카마수트라에 빗대 "야당 대표의 브렉시트 포지션(입장)은 카마수트라보다도 많다"고 조롱했다.
결국 브렉시트안 부결로 정치 인생이 끝날 것 같았던 메이 총리는 이날 19표 차이로 되살아났다.
이에 영국 매체 인디펜던트는 "메이는 파괴 불능(indestructible)"이라고 썼다. 이 신문은 "메이 총리는 (핵전쟁 이후) 핵겨울에서도 생존한다는 바퀴벌레, 수중 화산이 뿜어내는 유황가스에서도 사는 바닷속 조류(藻類) 같다"고 평했다. 또 BBC 방송은 이날 보수당의 대반전(大反轉) 분위기에 대해 "최근 수개월간 가장 단합된 보수당이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