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논설주간

어제 아침자 각 신문 1면엔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사진이 실렸다. 대통령이 내로라하는 기업 총수들과 텀블러를 들고 청와대 경내를 거니는 모습이었다. 독자들은 “한 번 봤던 그림인데…”라는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 12일 자 신문에 거의 똑같은 구도의 사진이 실렸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사진 속 인물들이 손에 든 게 테이크 아웃 종이컵에서 텀블러로 바뀐 것뿐이었다. 일회용품 추방 캠페인의 여파였을 것이다.

대통령 이미지 연출을 도맡는다는 탁현민 행정관이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번엔 정말로 청와대를 떠나겠다"며 그 이유를 "바닥났다. 밑천도 다 드러났고, 하는 데까지 할 수 있는 것까지는 다 했다"라고 썼다. 이벤트의 생명은 참신성인데 2년도 안 돼서 똑같은 구도의 사진이 나오는 것을 보니 "밑천이 드러났다"는 호소가 실감이 났다.

대통령 행사 준비에 동참한 경험이 있는 기업인은 "청와대가 탁현민을 붙잡는 이유를 알겠더라"고 했다. 행사 구석구석까지 맛깔나게 다듬는 솜씨가 탁월하더라는 것이다. 행사장에서만큼은 청와대가 탁 행정관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지난 1년 반 동안 대통령 행사에는 색다른 장면들이 선보이곤 했다. 사람들은 이제 알아보지도 않고 "탁현민 작품이겠지"라고 지레짐작한다. 지난주 대통령 기자회견 때도 몇 가지 장치가 작동했다. 회견을 위해 청와대 본관에 도착한 문 대통령은 복도 단상에 서서 28분간 회견문을 낭독했다. 대통령이 회견장 아닌 장소에서 회견문을 읽은 건 처음이라고 한다. 백악관 방식이라는 주석이 덧붙여졌다. 대통령이 사회자 없이 회견을 직접 진행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기자들이 있는 영빈관으로 이동할 때 김민기의 노래 '봉우리'를 비롯한 배경음악이 깔렸는데 그 곡들이 선정된 이유를 보도자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정권과 달라진 건 거기까지였다.

"대통령이 경제 상황을 엄중히 본다면서도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여쭙겠다"는 질문이 나온 것은 회견이 예정된 80분의 절반을 넘길 무렵이었다. 이제야 저 질문이 나오나 싶었다. 필자도 회견장에 있었다면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대통령은 "30분 내내 말씀드린 것이다. 새로운 답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답변을 거부한 것이다. 대통령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문 대통령이 2년 전 이맘때 대선 후보 토론에서 유승민 후보가 일자리 예산의 근거를 따져 묻자 "자세한 것은 내 정책 담당자에게 물어보라"고 질문을 잘랐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 연말 전용기 기자회견 때 주제를 외교·안보로 한정해 놓고 몇몇 기자가 "그래도 국민이 궁금해한다"며 국내 정치 문제를 물으려 하자 "외교 문제로 하라"고 질문을 막았던 장면도 겹쳐졌다. 기자 회견의 하드웨어는 미국식을 흉내 냈는지 모르지만 대통령에게 거북하고 불편한 질문은 잘라내는 소프트웨어는 과거 불통 정권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문재인 정부 사람들은 직급 낮은 공무원은 독자적인 판단 능력조차 없는 양 폄하 발언을 해왔다. 청와대 대변인은 김태우 특감반 수사관이 사찰 의혹을 쏟아 냈을 때 "언론이 6급 행정관에게 휘둘린다"고 했다.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청와대가 적자 국채 발행을 압박했다고 폭로하자 대통령은 "자기가 보는 좁은 세계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고, 여당 대표는 "사무관과 고위 공무원의 시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런 문재인 정부에서 탁현민 행정관의 거취는 경제사령탑, 비서실장 인사보다 더 주목받는다. 경제부총리, 정책실장이 교체된다고 소득 주도 성장 노선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비서실장, 국민소통수석 자리에 새 사람이 들어와도 청와대 운영 방식은 그대로지만 탁 행정관이 청와대를 떠나면 대통령 행사 모습이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탁 행정관이 연출한 각종 이벤트가 문재인 정부 초기 지지율을 견인한 힘이었다는 공감대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탁 행정관 말대로 이제 밑천이 드러나고 있다. 그의 아이디어가 고갈됐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은 이제 남북 정상회담에서 도보다리 대화 장면이 아니라 핵을 진짜 폐기하겠다는 김정은의 약속을 듣고 싶다. 청와대 기업인 초청행사에서는 텀블러 산책 장면이 아니라 투자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대통령의 화끈한 다짐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