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전직 사법부 수장으로는 처음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헌정 사상 초유의 상황을 맞은 법원 내부에선 침통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11일 양 전 대법원장 검찰 출석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본 판사들은 대부분 "참담하다"는 반응이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

서울중앙지법 한 판사는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방지법의 한 부장판사도 "사법부 전체가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었다"며 "(양 전 대법원장의) 잘잘못을 떠나 앞으로 어떻게 이 사태를 봉합하고 복구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은 지난 2017년 2월 한 판사의 인사 잡음에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특정 성향의 판사들을 뒷조사하고, 일부 재판에 개입하려고 시도했다는 의혹으로 번졌다. 의혹이 불거진 시점부터 지금까지 법원 내부는 갈가리 찢어졌다. 법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상처는 법원 내부가 이리저리 쪼개져서 다투게 된 것이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이 사법부를 믿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①부실한 1차 조사결과... 젊은판사들 "재조사하라"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났던 이탄희 판사가 갑자기 원소속 법원으로 복귀하면서 법원행정처와 법원 내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사이에 감춰져 있던 갈등이 표면화됐다. 심의관 발령 전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있던 이 판사가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활동을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이에 반발하자, 법원행정처가 이 판사의 발령을 취소한 것이다. 이 판사는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2017년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직원들에게 인사하며 차에 오르고 있다.

여러 의혹이 제기되자 양 전 대법원장은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상조사를 벌였다. 그해 4월 18일 진상조사위는 "법원행정처 간부가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를 부당하게 견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법원이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냈다.

이에 대해 젊은 판사들을 중심으로 "진상조사위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발이 나왔다. 이후 전국 법원의 판사 대표들이 모여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었고, 대법원장에게 재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은 재조사 요구를 거부했고, 이때부터 이른바 소장판사들과 대법원장의 갈등이 본격화했다.

②金 대법원장이 주도한 추가조사… '판사 PC조사' 놓고 갈등
그해 9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재조사가 시작됐다. 김 대법원장은 민중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위원장으로 한 추가조사위원회를 꾸려 2차 조사를 진행했다. 추가조사위 활동 중 의혹에 연루된 판사들의 컴퓨터 '강제 개봉' 문제가 법원을 둘로 갈랐다.

법원 내에서는 "공적인 목적이면 동의 없이도 컴퓨터를 열 수 있다"는 의견과 "판사 동의 없이 컴퓨터를 여는 것은 프라이버시(사생활)권과 형법상 비밀 침해 소지가 크다"는 의견이 서로 충돌했다.

2017년 10월 25일 오후 김명수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기념 기자간담회에 입장하고 있다.

추가조사위는 결국 당사자 동의 없이 PC 강제 조사를 했다. 위법성 논란이 일어 김 대법원장이 형사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추가조사위는 이듬해 1월 "특정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문서가 다수 발견됐다"며 법관의 독립침해가 우려된다고 했다. 또 대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댓글사건 항소심 재판에 관여한 정황도 나타났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어 ‘특별조사단'을 새로 구성했다. 2차 조사 결과에 대한 후속 조치의 일환이었다. 안철상 전 법원행정처장이 단장을 맡았다. 특조단은 3개월 반 가량 조사를 벌여 지난해 5월 말 법원행정처가 일부 법관 동향을 수집한 것은 맞지만 인사 불이익을 준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재판 개입’ 의혹도 "시도하려 했지만 실제 이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형사처벌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했다. 숱한 논란을 불렀지만 사실상 1, 2차 때와 같은 결론이었다.

"법원이 나서 고발하라" VS. "법원 내부서 해결해야"
이 같은 조사 결과가 오히려 법원 내부 갈등에 기름을 끼얹었다. "법원 스스로 고발하자"와 "법원 스스로 해결하자"는 양측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수사해야 한다는 쪽은 소장판사들이 중심이 됐고, 내부 논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쪽은 중견판사들이 중심이 됐다.

단독·배석판사들은 "형사책임 여부를 밝히기 위해 엄정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잇따라 발표했고, 반면 지법부장급 이상 판사들은 대체로 사법당국에서 수사의뢰, 수사촉구를 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논란은 김 대법원장이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며 더 심화됐다. 김 대법원장은 특조단 결과 발표 후 약 보름 뒤인 6월 15일 "재판을 거래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는 의혹의 해소는 필요하다"면서 "고발, 수사의뢰와 같은 조치는 할 수 없더라도 수사가 진행될 경우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상 검찰 수사를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김 대법원장이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대법관 13명은 "재판 거래는 근거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는 입장문을 냈다. 같은 사안을 두고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충돌하는 모양새가 됐다.

서울법원종합청사와 서울중앙지검.

검찰 수사에 당황… '영장 발부 여부' 놓고 내부 갈등
김 대법원장의 수사 협조 발표 이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는 본격화했다. 서울중앙지검은 특수 1~4부와 방위사업수사부의 검사, 수사관들을 투입하며 혐의 확인에 총력을 다했다. 그러나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구속영장이 잇따라 기각됐다. 검찰은 "제식구 감싸기 아니냐"며 반발했다. 이후 법원과 검찰 사이에 영장이 기각될 때마다 서로 입장문을 내며 충돌을 빚었다.

법원과 검찰 간 갈등 양상은 이내 법원 내부 다툼으로 번졌다. 지난해 10월 말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구속을 전후해 갈등은 고조됐다. 일부 고위 법관들이 내부 전산망 등을 통해 "검찰 수사가 지나치다"고 비판하자, "아직도 적폐를 감싸는 것이냐"는 반발이 나왔다.

최근 사표를 제출한 최인석 울산지방법원장은 당시 법원이 영장 발부에 신중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고,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검찰의 ‘밤샘수사’ 관행을 비판했다.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검찰이 효력이 끝난 영장을 갖고 와 위법한 압수수색을 했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

이 중 김 부장판사의 주장이 법원 내 논란이 됐다. 박노수 전주지법 남원지원장(부장판사)은 김 부장판사의 주장에 대해 "사실 관계가 불분명해 어떤 판단을 할 수 없다"며 "두루뭉술한 언급으로 다른 판사들이 섣부른 판단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또 한 판사는 익명으로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참고인이 재판에 영향을 미칠 사안을 이렇게 장외에서 토로하는 것은 직무윤리 위반이 아닌지 의문"이라고 했다.

법관 114명 모인 전국법관대표회의 - 각급 법원의 대표 판사들로 구성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지난해 11월 19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2차 정기회의를 갖고 있다.

"법관을 탄핵한 법관대표회의를 탄핵하라"
법원 내 갈등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현직 판사들에 대한 '탄핵 소추'가 논의됐을 때 극에 달했다. 각급 법원에서 대표를 하겠다고 나선 판사들로 구성된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지난해 11월 19일 '탄핵 소추도 검토돼야 한다'는 안건을 의결했다. 사실상 국회에 탄핵 소추를 촉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의결 직후 더불어민주당은 탄핵 소추를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대표회의 안건 투표에는 105명이 참여해 53명이 찬성, 52명이 반대·기권을 했다. 이날 주심 사건 진행을 위해 자리를 떴다가 투표를 못한 서경환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한 표 차이로 가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안건 의결 이후 법관대표회의의 대표성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회의에 나온 법관들은 자신이 소속된 법원을 대표한다며 나섰지만 실제 법원 내부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개인의 소신에 따라 투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 부장판사는 "법관회의 대표들 대부분은 사전에 소속 법원 판사들의 의견을 충실히 수렴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태규 울산지법 부장판사도 "탄핵 의결은 절차상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며 "법관회의를 탄핵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대리가 아닌 대표 자격으로 뽑혀서 의견을 낸 것인데 일부 의견을 대변하지 않았다고 특정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잘못됐다"며 반박하는 법관들도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하기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

⑥양승태 조사 당일도 서로 다른 목소리
11일 양 전 대법원장의 검찰 출석 전 있었던 기자회견을 두고도 법원 내부는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날 대법원 정문 앞에서 "법관들이 많은 상처를 받았고, 여러 사람들이 수사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아 참으로 참담하다"며 "모두 제 부덕의 소치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또 "나중에라도 (법관들의) 과오가 밝혀진다면 그 역시 제 책임"이라며 "내가 안고 가겠다"고 말했다.

재경지법의 한 배석 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책임회피하는 태도만 보이기 보다 자신이 지고 가겠다고 했다"며 "오늘 전직 대법원장이 밝힌 내용은 사법부에 보탬이 된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지방의 한 배석 판사는 "자꾸 편견, 선입견을 배제하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나중에라도 밝혀지면’이라는 단서를 넣었다"며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외면하며 마치 드러난 의혹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비겁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앞을 기자회견 장소로 선정한 것과 관련해서도 온도차가 있었다. 피의자가 검찰 출석시 검찰청 포토라인이 아닌 자신이 소속했던 기관 앞에 서는 것은 이례적이다. 한 서울고법 판사는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는다고 청와대에 들린 것과 모양새가 비슷하지 않느냐"며 "‘같은 피의자인데 우대받는 것 아니냐’, ‘전관예우다’ 등 말이 나올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반면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사실 경찰·검찰 포토라인은 수사기관과 언론사간 이해관계가 맞아 관습처럼 굳어진 것"이라며 "피의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원하는 장소에서 하는 것은 마땅히 인정해줘야 하는 권리라고 본다. 양 전 대법원장뿐만 아니라 어떤 피의자에게도 경찰, 또는 검찰 포토라인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