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장편소설 ‘서 있는 여자’에서 주인공 연지는 주체적이다. 여성성을 강요하는 남편과 이혼하려 한다. ‘이혼하면 넌 버린 자식’이라는 부모의 만류도 뿌리친다. 연지는 자신을 위한 노란 장미꽃다발을 집에 사들고 와 일을 위해 타자기 앞에 앉는다. 소설 제목이 ‘서 있는 여자’인 이유는 모든 여성이 온갖 풍파에도 꿋꿋이 서 있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남녀 사이에 갈등을 근심하는 이들이 많다.

박완서 작가는 1990년대에 이러한 부분,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결혼생활과 독립, 능동성에 주목했다. 장편소설 '서 있는 여자'는 작가의 고민과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낸다. 품위 있는 교수 남편을 가진 경숙 여사는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는데, 아들을 장가보낼 때 시어머니 노릇을 하지 못해 두고두고 약 올라 한다. 처음 며느릿감이 집에 인사 왔을 때 사소한 것이라도 트집 잡는 작은 권력을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나는 성인이며 결혼하는 당사자 역시 나"라며 경숙 여사에게 틈을 내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시댁살이를 좀 시켜 보려 했지만 아들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새색시와 함께 외국 유학을 떠났다.

부모 노릇을 할 기회가 한 번은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어느 잡지사 기자가 된 딸 연지가 남았다. 경숙 여사는 이번에야말로 톡톡히 부모 노릇을 하고야 말리라 다짐한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딸의 선 자리를 고르기도 하고 퇴짜도 놓고 하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다. 연지 역시 그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철민과 결혼하겠다고 경숙 여사에게 통보한다.

가난한 집안의 늦둥이인 철민은 경숙 여사의 눈에 찰 구석이 없었지만, 연지에게는 속셈이 있었다. "자기랑 나는 절대적으로 동등하지, 그렇지?"라며 철민에게 동조를 요구하는 연지는 그의 모습이 가부장적 남성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독립적인 모습을 인정해 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결혼 상대로 택한 것이다.

경숙 여사는 화려한 장소에서 철민네 식구들을 기죽일 만반의 준비를 한다. 그런데 하필 남편이 오질 않는다. 경숙 여사는 몇 년 전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오해하며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자포자기식으로 남편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낸다. 깜짝 놀란 남편은 아이들이 있으니 당장은 말고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이혼을 미루자고 한다. 이후 남편이 가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기에 이혼 이야기는 흐지부지 넘어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남편은 연지의 결혼이 가까워지자 이혼 약속을 상기시킨다. 경숙 여사에게는 청천벽력이다. 연지의 결혼식 날, 남편은 우리의 이혼 날이라며 짐을 꾸린다. 충격을 받은 경숙은 고등학교 동창 중 가장 잘나가는 이혼녀 친구 세 사람을 차례로 방문해 혼자 사는 여자의 참모습을 보고자 한다. 경숙 여사는 화려한 이혼녀 친구들이 실상은 쓸쓸하고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에게서 돌아오라는 연락이 없는 것을 서러워한다.

한편 연지와 철민은 한 사람은 돈 벌고 한 사람은 공부하게끔 번갈아 대학원에 다니기로 했는데, 살림을 맡기로 한 철민이 영 심상치 않다. 평소에는 철민이 집안일 담당이지만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순식간에 앞치마 차림의 새댁 모습으로 변신하는 연지를 보고 철민은 동창들 여럿이 종종 신혼집에 방문하기를 바란다. 연지는 좁은 아파트에 북적대는 무리의 안주를 계속 만들어내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다. 철민은 그저 흐뭇하다.

철민은 점점 연지에게 숨겨 왔던 가부장성을 내보이고, 심지어 시댁을 방문했을 때 좁아터진 방에 친척들이 다 같이 자고 있었음에도 몰래 연지를 덮쳐 반강제로 성관계를 갖는다. 남편의 동의 없이 연지가 낙태수술을 했음을 알게 된 철민은 연지가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손찌검을 계속한다. 그뿐 아니라 당장 일을 그만두고 집 안에 들어앉으라고 추상같이 명령한다.

연지가 집을 비운 다음 날 아침 일찍 신혼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고운 침구 위에 낯선 여성과 함께 누워 있는 철민을 발견한다. 그는 그 여자가 아무에게나 몸을 주는 원래 그렇고 그런 여자니 어엿한 가정부인인 네가 신경 쓸 것이 못 된다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결국 연지는 이혼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딸의 이혼 이야기에 남편은 경숙 여사를 당장 불러들이고, 온갖 수를 다 써 이혼을 막는다. 은근슬쩍 경숙 여사의 이혼도 없던 일이 된다. 그러나 철민의 가부장성과 폭력을 더 참을 수 없었던 연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에서 철민을 쫓아낸다. 그리고 연지는 혼자인 삶을 관철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다.

이러한 남녀 간의 갈등이 현실성 없는 옛날 옛적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당장 인터넷 게시판을 아무 데나 들어가 봐도 결혼생활에서 겪는 괴로움을 털어놓는 여성이 많다. '서 있는 여자'를 시대착오적이라고 하기에는 이러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하다.

누구는 아파서 명절의 시댁 행사에 참석하지 못해 남편 혼자 시댁을 방문하고 돌아오는데, 차에 뭔가 놓고 온 것이 있다며 주차장에 나간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가니, 차 안에서 어른들이 가져가라고 싸 준 명절 음식을 혼자 만끽하고 있었단다. 아내에게는 아무것도 안 가져왔다고 말한 후 혼자만의 만찬을 즐긴 것이다.

남자가 집을, 여자가 혼수를 해 오는 관습에서 벗어나 결혼 비용을 함께 부담하는 이른바 '반반 결혼'이 요즘 주목받고 있다. 아무래도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난 남자들은 이런 결혼을 선망할 것이다. 그런데 반반 결혼을 했다가 후회하는 여성들은 마치 연지가 그랬던 것처럼 공평하게 같은 비용을 지출하면 동등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경우가 많다.

반반 결혼을 했다는 기혼 여성들은, 절대로 반반 결혼을 하지 말라고 미혼 여성들에게 충고한다. 반반이라고 해 봤자 돈 빼고는 결혼생활에서 여성이 감당하는 몫이 많으니 차라리 돈이라도 적게 쓰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연지가 겪었던 고충들을 여전히 겪는 여성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연지가 그랬듯 이혼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단은 자기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여자'가 되어야 이러한 갈등을 헤쳐나갈 수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떠도는 결혼'에서 '서 있는 여자'로 바뀐 까닭도 연지와 모든 여자가 꿋꿋하게 우뚝 '서 있는 여자'가 되길 바라는 작가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