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혜 사회정책부 차장

올 4월 말 아키히토가 일왕(日王)에서 물러나고 5월에 나루히토가 그 자리에 오른다. 아키히토 일왕이 재위한 31년간을 '헤이세이(平成) 시대'라 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그 얘기로 올 신년사를 시작했다.

그는 "헤이세이 시대 마지막 봄을 순탄하게 맞으시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헤이세이 시대는 잃어버린 20년, 취직 빙하기, 전례 없는 자연재해, 인구 감소가 이어지며 '포기'라는 이름의 벽이 일본을 덮은 시절"이라고 간추린 뒤, 자신은 "그 벽에 도전했다"고 했다.

재집권 후 6년간 경제가 살아나 "청년 취업률이 사상 최고 수준이고, 중소기업 임금 인상률이 20년 만에 최고가 됐고, 외국인 관광객 수가 3000만명을 넘어섰고, 세수(稅收)도 역대 최대"라고 자랑했다. 그는 "올해가 '일본의 내일'을 여는 한 해가 되게 하겠다"고 신년사를 끝맺었다.

아베 총리 신년사는 통산 여덟 번째다. 첫 신년사는 1년 만에 실각한 1차 집권 때였다. 나머지 일곱 번은 2012년 12월 재집권에 성공한 뒤 했다. 그가 한 신년사가 늘 박수 받지는 못했다.

2007년에 한 첫 신년사는 특히 반응이 냉랭했다. 그때 아베는 모호한 미문(美文)을 구사했다. "활력과 찬스와 상냥함(優しさ)이 충만한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만들겠다" "창조와 성장을 목표로 삼겠다" "세계인이 동경하고 존경하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게 하겠다" 같은 공허한 문장을 반복했다.

재집권 뒤 신년사는 달랐다. 2013년 신년사에서 그는 "실현 불가능한 공허한 말은 필요 없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피드와 실행력"이라고 했다. '디플레이션 탈피'라는 명확한 목표를 내걸고, "대담한 금융 완화, 기동성 있는 재정 투입, 민간 투자 활성화"라는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아베 정권의 사명(使命)은 강한 경제를 되찾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재집권 초기 한두 해는 버릇처럼 이념 섞인 얘기를 곁들였다. "전후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식이었다. 뒤로 갈수록 그런 말이 줄었다. 자기가 첫해에 내건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성과를 보고하는 대목을 늘려나갔다.

아베 정권의 성과가 쌓일수록 아베 총리 신년사가 짧아지고 힘차졌다. 2007년엔 우리말로 풀었을 때 200자 원고지 12장이 넘었는데, 재집권 뒤 10장, 9장으로 줄다가 8장이 됐다. 이념과 구호는 줄고 실적이라는 '팩트'가 신년사를 채웠다.

문재인 대통령 신년사는 일단 길다. 집권 뒤 두 번 신년사 분량이 55장이다. 아베 총리가 재집권 뒤 일곱 번 한 신년사를 합친 61장과 맞먹는다. 문 대통령은 두 번 다 '촛불' 얘기로 시작했다. 이어 '불공정과 불평등을 깨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뒤, 수많은 정책을 나열했다.

'적폐를 근절하자, 좋은 일자리 늘리겠다, 광주형 일자리에 힘을 모아 달라, 최저임금 올리겠다, 과로 사회가 계속돼선 안 된다, 북핵 문제를 풀겠다, 개헌이 필요하다, 창업·결혼·임신·출산·보육·노후생활·소상공인·중소기업을 지원하겠다, 10조원 혁신모험펀드를 만들겠다, 노인 임플란트를 무료로 해주겠다….' 이런 수많은 약속 사이사이에 '내가 가는 길이 옳으니 힘을 모아 달라'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은 잘못된 사회였다'고 했다.

아베 총리와 문 대통령을 단순 비교할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은 지나온 길도, 앞으로 갈 길도 아주 다르다. 다만 첫 집권 때 1년 만에 실각했던 아베 총리가 지금 전후(戰後) 최장수 총리를 바라보는 건, 실적 덕분이지 '긴 말' 덕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