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 '판사 인사'서 시작된 법원행정처의 악몽
'판사 블랙리스트'에서 '재판 거래' 의혹까지
"대법원장·대법관들 불구속 기소로 마무리" 의견도
법원 내부 "보혁 갈등·주도권 다툼이 빚은 참사"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6월 1일 자택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전직 대법원장이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다. 헌정 사상 처음이다. 검찰이 작년 6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 착수한 지 7개월 만이다.

4일 검찰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오는 11일 오전 9시 30분 소환해 조사할 예정이다.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실장과 차장, 특허법원장, 대법관을 지낸 ‘엘리트 판사’인 양 전 대법원장은 퇴임한 지 1년 5개월 만에 피의자 신분이 됐다.

◇'블랙리스트' 의혹서 출발…梁 "재판거래, 심한 모욕"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은 지난 2017년 불거졌다. 그해 2월 법원행정처로 발령난 이탄희 판사가 돌연 사직서를 냈다가 원소속 법원으로 되돌아가면서다. 이 판사가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부터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발한 것이다. 법원행정처가 진보 성향 학술단체로 알려진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활동을 감시·통제하려 했다는 정황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그해 3월 진상조사를 수용했다. 법원의 첫번째 자체 조사 결과 사법행정권 남용 사례가 일부 드러났다. 부실 조사라는 의혹이 일었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하며 재조사와 3차 조사까지 이어졌다. 대법원은 법을 위반한 정도는 아니라고 결론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6월 1일 경기 성남시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그는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결단코 없었다"며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그 재판을 한 법관들에게 심한 모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법원 재판을 함부로 폄하하는 걸 견딜 수 없다. 대법원 재판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서도 "단연코 없다"며 "이 두 가지는 제가 양보할 수 없는 한계점"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민단체 등이 고발장을 연이어 접수하면서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6월 15일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검찰은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를 총동원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 USB가 스모킹건…檢 "양승태 공범"
수사의 핵심 단서는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USB(이동식 저장장치)였다. 그는 2015년 8월부터 2017년 3월까지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근무하며 실무를 총괄했다. 이보다 앞선 2012년 8월부터 3년간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었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의 USB에서 임 전 차장이 재직 당시 작성하거나 작성에 관여한 문건 8000여 건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일선 판사부터 법원행정처 실장급 고위 법관까지 폭넓게 조사하며 각종 증거를 다져갔다. 이 과정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도입하기 위해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여러 정황이 드러났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의혹은 △일제 강제동원 민사소송 '재판거래’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 확인 소송 개입 △헌법재판소 내부 정보 유출 △법관 사찰 등이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차량과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 차한성 전 대법관의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며 수사에 속도를 냈다. 검찰이 이번 수사와 관련해 처음으로 신병을 확보한 것도 임 전 차장이었다. 임 전 차장은 작년 10월 15일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고, 12일 만인 같은 달 27일 구속됐다.

작년 11월 14일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는 양 전 대법원장이 공범으로 적시됐다. 임 전 차장에게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직무유기, 공무상 비밀누설,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 혐의가 적용됐다. 검찰은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반헌법적 행위에 대해 현행법상 적용할 수 있는 범죄 혐의를 추출해 기소한 것"이라고 했다.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6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대법관들 줄소환…"양승태 불구속 기소" 시각도
검찰의 칼끝은 법원 최고위직으로 옮겨갔다. 검찰은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고영한·박병대 대법관을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헌정 사상 전직 대법관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도 처음이었다. 이들은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등 혐의를 받았다. 두 사람에 대한 구속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됐다. 검찰은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중심으로 보강 조사에 주력했다. 이인복·김용덕·차한성 전 대법관도 소환해 조사했다. 검찰에 소환된 전직 대법관만 다섯 명이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할 때부터 '최종 목적지'는 양 전 대법원장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았다. 이번 사안을 '조직적 범행'으로 보는 검찰의 시각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실었다. 검찰은 "이 사건은 특정인의 개인적 일탈이 아닌 업무상 상하 관계에 의한 지휘감독에 따른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하지만 법원의 시각은 다르다. 실무 총책임자였던 임 전 차장에 대해선 "범죄사실 중 상당한 부분에 대해 소명이 있다"며 구속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임 전 차장의 상급자로 법원행정처장을 지내 박·고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법원은 박 전 대법관에 대해 "관여 범위 및 공모관계의 성립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했고, 고 전 대법관에 대해 "관여 정도 및 행태와 일부 범죄사실에 있어 공모 여부에 대한 소명 정도 등을 따져볼 때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 소환 이후 박·고 전 대법관과 함께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기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박·고 전 대법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재차 청구했다가 기각될 경우 수사 동력이 꺾일 수 있기 때문에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으로 직행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이미 대법관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상황에서 전직 대법원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검찰에게는 부담일 것"이라며 "적폐수사에 대한 국민 피로감도 높은 상황이어서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