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희 무용 연구가

피부가 까무잡잡한 나는 '색 보정'이 필요한 존재였다. 발레단에선 주역 무용수만 몸에 분을 바른다. 그런데 '백조의 호수'처럼 흰 튀튀를 입는 군무에서 내가 도드라지다 보니 분장 담당자가 한숨을 쉬며 나에게 분을 발라주곤 했다. 은연중에 주눅이 들었다. 발레는 지금 피부색 혁명 중이다. '흑인은 발레에 적합하지 않다'는 통념이 급격히 깨지고 있다. 미스티 코플랜드를 비롯하여 스타급 흑인 무용수들이 등장하고 흑인 인구를 발레에 유입하려는 사회운동도 활발하다. 토슈즈와 타이즈 색깔도 다양해지고 있다. 흑인 발레리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발레단의 최신 홍보 전략일 정도다.

이 혁명의 시발점이라 꼽을 수 있는 두 인물이 올해 타계했다. 아서 미첼과 레이븐 윌킨슨이다. 미첼은 1950년대 뉴욕시티발레단의 첫 흑인 주역 발레리노. 재능과 운을 모두 갖춘 무용수였으나 마틴 루서 킹의 암살에 충격받아 흑인을 위한 발레단과 발레 학교를 세웠다. 윌킨슨은 미국 발레사의 첫 흑인 발레리나다. 미국 남부 지역 순회공연에서 KKK단이 객석에서 소란을 피우고 무대 위에 올라와 그녀를 잡아 내리려 했다. 누적된 공포 속에서 윌킨슨은 2년 만에 발레단을 그만두었다. 미첼과 윌킨슨은 같은 해에 데뷔했지만, 미첼이 영웅적 선구자가 될 동안 윌킨슨은 춤추고 싶다는 열망조차 접어야 했다. 그들의 대조적인 삶은 인종차별 안에서의 성차별을 드러낸다.

막상 깨지고 나면, 통념이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통념을 깨뜨리기 위해선 끈질긴 저항이 필요하다. 수많은 이가 거리에 나오고, 누군가 자처해 비난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안타까운 희생자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꿈쩍하지 않던 통념이 어느 순간 깨진다. 내년엔 어떤 체형이나 피부색이, 누군가의 정체성이나 문화가 발레에 적합하지 않다고 단언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