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사회부장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소련 당국이 만든 선전 영상이 있다. 흰색 작업복을 입은 여성이 "버려진 개처럼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주위의 대중들이 "처단하라"고 동조한다. 당시 소련에서 '버려진 개'는 스탈린의 특정 정적(政敵)을 가리켰다. 하지만 점점 범위가 늘어나 권력 냄새도 맡은 적 없는 보통 지식인까지 개처럼 끌려가 죽었다.

'살찐 돼지'로 지목된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엔 '쿨라크'라고 부르는 부농(富農)을 가리켰다. 하지만 '버려진 개'처럼 '살찐 돼지'의 범위도 가축 몇 마리, 땅 몇 평을 소유한 자영농으로 확대됐다. '내 땅' '내 가축'이라며 소비에트 권력의 사유재산 강탈에 반항하는 모든 사람이 돼지로 찍혔다.

스탈린의 '버려진 개'와 '살찐 돼지'는 세 갈래 길을 걸었다. 학살당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시베리아에 버려졌다.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 10만, 100만이란 주장도 있고 1000만이란 주장도 있다. 김단야·박진순 등 공산혁명을 동경해 소련에 머물던 한국인 사회주의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권력의 눈에 개였을까, 돼지였을까. 광기(狂氣) 이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대중에게 광기를 끌어낼 때 권력은 상징 조작을 동원한다. 먼저 '그들은 우리와 다르고 영원히 같아질 수 없다'는 타자화(他者化) 조작이다. 스탈린은 정적과 계급에서 시작해 모든 비협조자를 타자로 만들었다. 다음은 비인간화(非人間化) 조작이다. 그들은 타자일 뿐 아니라 사람도 아니다. '버려진 개' '살찐 돼지'에 불과하다. 죄책감을 싫어하는 대중은 이런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상대를 인간으로 보면 손에 피를 묻힐 수 없기 때문이다.

나치가 만든 '영원한 유대인'은 악마의 기록 영화로 역사에 남아 있다. '유대인은 영원히 번영한다'는 제목이 아니다. '유대인은 영원히 우리와 다른 타자'라는 뜻이다. 영화는 게르만 문명사회와 다른 유대인의 야만적 특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방랑하는 유대인을 기생할 인간을 찾아 떠도는 쥐로 은유한다.

쥐는 인간에 기생해 살다가 병균을 퍼뜨려 인간을 파괴한다. 그러면 다른 인간 군락으로 옮겨 기생하다가 또 인간을 파괴한다. 고향을 잃고 유럽에 붙어살면서 부를 쌓는 유대인을 쥐의 습성과 일치시킨다. 영화는 유대인의 가축 도살 장면과 질서 정연한 독일 민족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끝난다. 유대인은 쥐다! 병균을 퍼뜨리는 쥐다! 이런 조작으로 600만명을 쥐잡듯 죽였다.

세월이 지나면 인간은 나아질까. 20세기 말 르완다 내전에서 후투족 병사들은 정부로부터 학습을 받았다. "투치족은 바퀴벌레다." 20세기 막판 벨기에의 옛 식민지에서 일어난 학살극이다. 식민지 민족을 분열시켜 일찍이 '타자화'를 조장한 것은 문명국 벨기에였다. 교사와 목사까지 학살에 가담했다. 후투족 목사가 투치족 목사를 살해하면서 "신은 너를 구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눈에 상대는 바퀴벌레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일본의 어느 거리에선가 "조선인은 바퀴벌레"란 스피커 음성이 울린다.

청와대 문제를 폭로한 김태우 수사관에 대해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궁지에 몰린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물을 온통 흐리고 있다"고 했다. 권력이 한 인간을 '미꾸라지'라고 했다. 특정인을 향한 은유가 집단을 향한 스탈린과 나치의 은유와 같다고 보지 않는다. 권력의 은유에 어떤 역사적 함의가 있는지 모르고 발언한 지력(知力)의 한계일 수도 있다. 권력이 '미꾸라지'라고 했다고 대중이 달려들어 도륙 내는 시대도 아니다.

다만 개 은유, 쥐 은유에서 느끼는 권력의 살기(殺氣)를 미꾸라지 은유에서도 느낀다. 정도만 다를 뿐 분노가 이성을 삼켰다. 그 후 배신자와 조력자를 향한 청와대의 반응도 살벌하다. 청와대가 인간성을 부정한 대상을 검찰이 어떻게 요리할지 눈에 선하다. 권력 주변에서 쏟아내는 비방은 그의 인간성을 파괴한 지 오래다.

문재인 정권만큼 노골적으로 타자화에 골몰한 경우가 없다. 촛불혁명 깃발 아래 이질적 타자로서 '적폐(積弊)'를 개념화했다. 여기에 속하면 걸릴 때까지 수사를 받는다. 죽을 때까지 모욕당한다. 전 사령관이 적폐로 몰려 목숨을 끊어도 현역 후배가 빈소에 오지 않는다. 찍히면 자신도 타자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권의 타자화는 갈 데까지 갔다. 이제 우리 사회에 비인간화까지 덧씌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