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1988년 총선에서 만들어진 4당 체제는 첫 여소야대였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이 컸다. 쟁점 법안을 두고 종종 야 3당의 공조와 대통령의 거부권이 충돌했다. 그러나 당시 정국은 극한적 대립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예컨대, 1989년 초 야 3당은 지방자치법을 통과시켰고 노태우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후 여야는 논의를 재개했고 결국 4당 합의로 지방자치법이 통과되었다. 각 당은 의견 차를 좁혀가려는 정치력을 발휘했고, 그래서 4당 체제는 김재순 국회의장 표현대로 '황금분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 1월 3당이 합당하면서 4당 체제는 양당 체제로 바뀌었고 정국은 대결 구도로 전환됐다. 여야 합의로 처리한 지방자치 실시도 유예됐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를 양극적 대립이 대신했다.

이후에도 양당 구도가 만들어지면 어김없이 극심한 갈등이 생겨났다. 2004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은 이른바 '4대 개혁 법안'을 밀어붙였고 여야는 격하게 충돌했다. 2008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얻은 한나라당이 추진한 한미 FTA 인준을 두고는 전기톱과 최루탄까지 등장했다.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을 얻었지만 원(院) 구성에만 석 달이 걸렸고 세월호 특별법으로 대립하면서 5개월간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못했다. 이처럼 양당 구도 아래서는 '다수의 힘에 의존한 밀어붙이기'와 이에 대한 극단적 저항이 부딪치면서 정치는 파행을 거듭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다당(多黨) 구도는 양극적 대립을 피하기 위한 국민의 현명한 선택인 셈이다. 사실 미국 이외에 양당제 국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영국도 양당제가 아니다. 복잡다기한 세상에 두 정당이 수많은 요구와 이해관계를 제대로 반영하기란 불가능하다.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제도화한다는 점에서 양극적 대결 정치를 넘어서게 하는 좋은 방안일 수 있다.

논란이 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금처럼 지역구와 정당 명부 당선자를 각각 합산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 투표의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300석을 기준으로 할 때 어느 정당이 정당 투표로 30%를 득표했고 지역구에서 40석을 차지했다면, 이 정당에는 득표율만큼인 90석이 배정되고 지역구 40석을 뺀 50석이 비례대표로 주어지게 된다. 정당 투표가 중요한 만큼 정당은 국민 목소리에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반대하고 있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은 두 정당에도 딱히 손해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의 지지세는 예전 같지 않다. 예컨대 부산 광역의회 선거 결과를 보면 전에는 자유한국당이 압도적이었지만, 이번에는 더불어민주당이 41석, 자유한국당이 6석이었다. 선거 때 부는 '바람'에 따라 이처럼 어느 한 정당이 지역 의석을 독차지할 수 있다. 다음 선거도 이렇다면 자유한국당은 'TK 자민련' 신세가 될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수의 분열이다. 현실적으로 보수 정당의 통합 가능성은 크지 않다. 보수 정당이 통합되어도 분열된 보수 유권자를 모두 끌어안기는 쉽지 않다. 다수제 방식하에서 지지층의 분열은 선거에서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더불어민주당은 그동안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해 오다가 태도가 돌변했다. 개헌에 이어 선거 제도 개혁까지 내팽개쳤다. 민주당이 이렇게 소극적인 것은 지방선거를 보면서 다음 선거에서도 압승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기대감이다. 당시 대통령 지지도는 80%에 달했고 지금은 50%에도 못 미친다. 앞으로 지지도는 더 낮아질 것이다. 민심의 바람이 지방선거 때와 반대로 불면 그때는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당할 수 있다.

이 선거 제도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우리 정치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천은 특정인에 의해 좌지우지되거나 나눠 먹기식으로 해왔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공천 제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유권자에게 명분을 갖고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비례대표제 도입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 그리고 투명한 공천 제도 확립을 위해 꼭 필요하다. 2년 전 촛불 집회에서 시민들은 새로운 정치를 요구했다. 선거 제도와 공천 개혁이야말로 새로운 정치로 이끄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정치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외면하고 있는 두 거대 정당의 모습이 볼썽사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