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를 사칭한 김모(49)씨에게 거액을 송금하고 두 자녀의 취업까지 알선한 윤장현(69) 전 광주시장이 김씨로부터 "노 전 대통령의 혼외자 남매가 있으니 취업을 부탁한다"는 말을 듣고 청탁에 나섰던 것으로 4일 확인됐다.
윤 전 시장의 보이스피싱 사건을 수사 중인 광주지검과 전남지방경찰청은 윤 전 시장이 '1인 2역'을 하는 사기꾼 김씨에게 속아 보이스피싱 피해를 보고 취업 청탁에까지 연루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검경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해 12월 중순쯤 권 여사를 사칭하면서 경남 사투리로 윤 전 시장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다. 김씨는 "광주에 저의 메신저가 있다. 그 메신저가 중요한 부탁을 할 것이다. 저는 정치적인 입장이 있어 말씀을 드릴 수가 없다. 잘 봐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010-××××-×××× 번호로 전화하면 그 메신저가 뭔가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윤 전 시장은 곧바로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은 광주 사투리를 쓰는 여성이었다. 여성은 "노 전 대통령의 혼외자를 키우는 광주의 양육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여성은 "광주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이라며 "노 전 대통령의 혼외자들은 남매인데 취업이 어렵다. 시장님이 꼭 도와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 여성은 대범하게 시장실까지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남매의 취업을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경 조사 결과 '광주의 양육자'는 사기꾼 김씨였고, 취업이 필요한 '혼외자 남매'는 김씨의 아들 딸이었다. 김씨가 두 대의 휴대폰을 쓰며 사투리와 목소리를 바꿔 윤 전 시장에게 연락한 것이다. 이 같은 '1인 2역' 사기 행각은 사기범 김씨의 진술로 확인됐다고 검찰은 밝혔다. 지난해부터 광주 정가에선 '노 전 대통령의 혼외자가 광주에서 산다'는 뜬소문이 돌았다. 올해 6월 지방선거 때까지 소문은 잦아들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사기꾼 김씨가 이 같은 소문을 활용한 것이 아니냐고 추측한다.
'혼외자 취업'에 나선 윤 전 시장은 지난 1월 사기꾼 김씨의 아들인 조모(29)씨를 광주시 산하 김대중컨벤션센터(DJ센터)에 채용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윤 전 시장은 "꼭 도와줘야 할 사람"이라며 조씨를 정규직으로 뽑으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사 담당자의 반대로 조씨는 임시직으로 들어갔다. 조씨는 DJ센터에서 7개월간 전시 행사 지원 등 업무를 맡다 지난 10월 퇴사했다. 윤 전 시장은 또 김씨의 딸(30)이 광주 사립 중학교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도록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혐의도 받고 있다. 최근 결혼을 한 김씨의 딸은 여전히 근무 중이다.
광주 시민들은 윤 전 시장의 보이스피싱 사건이 점입가경으로 치닫자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광주시청의 40대 공무원 박모씨는 "모셨던 시장이라 안타까우면서도 실망감이 크다"며 "보이스피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혼외자 사기까지 당한 점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신교 목회자 양모씨는 "광주 시민은 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있는데, 윤 전 시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며 "광주의 어른으로 남길 바랐는데 공천 헌금으로 의심되는 돈을 보내고, 취업 청탁에까지 연루됐다니 화가 난다"고 말했다.
안과 의사 출신인 윤 전 시장은 의료 봉사차 네팔에 머물고 있다. 경찰은 윤 전 시장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고, 검찰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그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고 5일 출석을 통보했다. 하지만 윤 전 시장 측은 묵묵부답이다. 공직선거법 공소시효 만료일은 오는 13일이다. 고의로 시간을 끌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편 검찰은 윤 전 시장이 보이스피싱에 걸려 김씨에게 보낸 4억5000만원 중 지인에게 빌렸다는 1억원을 광주 모 건설사 회장이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