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이흥섭 지음 | '잇다' 옮김 | 논형 | 280쪽 | 1만5000원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난 이흥섭(1928~2014)은 1944년 5월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하다가 징용당해 일본에 끌려갔고 광복 후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당시 16세였던 그는 징용 대상이 아니었지만 태평양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일제(日帝)는 호적 나이를 조작해가며 식민지 소년을 끌고 갔다. 아버지는 하얀 목면 양복을 이별 선물로 줬다. 이 책은 규슈(九州) 사가(佐賀)현의 탄광에 끌려간 그가 이듬해 1월 1일 탈출해 도망 다니다가 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약 1년 3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소년은 2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훈도시' 차림으로 막장에 투입됐다. 콩깻묵이 절반 이상인 밥에다 단무지 두 쪽이 전부인 식사는 너무 부실해 배가 몹시 고팠다.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가 준 보따리 검사에서 가락지가 나오자 상황이 더 나빠졌다. "전쟁 중에 이런 물건을 숨기고 공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非)국민' 딱지가 붙었고, 외출 금지 등의 벌이 가해졌다. 그는 탈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도망갔다가 잡혀온 조선인들이 생고무 몽둥이로 초죽음 되도록 맞는 걸 봤지만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설날 첫 외출을 나갔고, 그날로 탈출했다. 복귀 시간이 다가오자 탄광 반대인 북쪽 해안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몸을 숨기면서도 그는 공습으로 폐허가 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우리를 이런 꼴로 만든 일본의 모습이라니!'

그러나 이씨의 수기에는 적의(敵意)가 드물었다. '정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전쟁에 휩쓸린 일본인'이라며 매섭게 질책하면서도 전쟁에 고통받는 일본인들을 향한 연민과 보편적 인간애를 함께 강조했다. 탄광에서 그가 속해 있던 조(組)를 지휘했던 남자는 "사가현 지도를 구해달라"는 소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오히려 다음 날 지도를 건네며 "북쪽으로 가면 군항이 있다"고 넌지시 알려줬다. 주방의 한 소녀는 늘 배가 고픈 그의 손에 몰래 누룽지를 쥐여 줬다. 그가 도망 나와 숨어 있던 조선인 합숙소에 패전 3개월 전부터 일본 군인들이 나타나 구걸했다. 이씨에게 밥을 해주던 조선인 아주머니는 '군복 입은 젊은이'에 불과해진 일본 청년들의 철밥통에도 쌀밥을 꾹꾹 담아 돌려보냈다.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 소년은 귀국선을 타기 위해 후쿠오카 북쪽 하카타 항에 나갔다. 하지만 고향에 갈 수 없었다. 몰려든 조선인은 수십만 명인데 부산행 배는 매일 300명씩만 싣고 갔다. 귀국을 기다리다 굶어 죽을 판이었다. 그는 "강제로 데려왔으면 어떻게든 돌려보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울분을 토했지만 결국 당장의 생활고부터 해결해야 했다. 이후 막노동을 하며 규슈 일대를 떠돌다가 1970년부터 오사카에서 고철상을 운영했다.

이 책은 역사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동 노력이 빚어낸 값진 성과다. 1977년 이씨의 딸 동순이 다니던 중학교 담임 무로타 다쿠오씨가 가정방문을 왔다. 이씨의 징용 체험담을 들은 무로타씨는 당시 중3이던 제자에게 "아버지의 역사를 써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해 겨울방학 동순이 아버지와 마주 앉아 구술을 받아 적은 것이 이 책의 출발이었다. 무로타씨는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은 놀라움이었다"며 글을 묶어 이듬해 10월 26쪽짜리 소책자를 냈다. 이후 10년간 이씨가 직접 일어사전을 뒤져가며 집필한 것을 더해 '아버지가 건넌 바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펴냈다. 이씨의 서툰 일본어 글을 여러 교사가 자원봉사로 교정해줬다. 책을 읽은 규슈와 오사카 지역 중학생들이 그의 사연을 연극 무대에 올렸다. 그 사이 대학교수가 된 무로타씨는 2006년부터 자신이 재직하는 류쓰대학에 그를 초청해 해마다 두 번씩 강연을 부탁했다. 고령을 무릅쓴 이씨의 강연은 사망 2년 전인 2012년까지 계속됐다. 강제징용 판결을 둘러싸고 미래가 없다는 듯 불화하는 한·일 양국의 현실이 읽는 내내 안타깝게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