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글 소설은 조선 중기 허균(1569~1618)이 쓴 '홍길동전'이며, 작품의 주제가 '적서(嫡庶) 차별 타파와 사회 개혁'이란 것은 한국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상식'이다. 하지만 이윤석(69)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모두 틀렸다"고 주장한다. ▲'홍길동전'은 1800년 무렵 어느 평민 작가가 썼고 ▲최초의 한글 소설도 아니며 ▲사회 개혁이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신분 상승 소망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윤석 교수는“‘홍길동전’의 허균 창작설은 한글 소설이 서민의 장르라는 걸 간과했다”고 했다.

이 교수가 연구서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한뼘책방)를 냈다. 그는 '홍길동전 연구' 등을 펴낸 고전문학 연구자다. 25일 만난 이 교수는 "한글 소설의 발전 단계상 '홍길동전'은 허균 시절에 나올 수 없는 작품"이라고 했다. "중국 소설을 번역하다가 한글 소설이 나오고, 이것이 세책집(도서 대여점)을 중심으로 민간에 확산됩니다. 그 뒤 18세기 후반에 가서야 새로운 형식의 한글 소설이 창작되죠." 짧은 분량, 주인공의 입신출세, 군담(軍談) 등을 특징으로 삼는 '소대성전' '조웅전' '유충렬전' 등인데 '홍길동전'도 이 유형 중 한 작품이란 것이다.

숙종 이후 작품이라는 '단서'도 작품 속에 있다. 1692년(숙종 18년) 이후 실록에 등장하는 도적 장길산을 홍길동이 '옛날 사람'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광해군 때 죽은 허균이 쓸 수 없는 내용으로, 19세기까지 나온 판본 30여 종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당초 원본에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 교수 연구에 따르면, '허균 창작설'은 경성제대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1927년 처음 주장했다. 이식의 '택당집' 중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내용 때문이었으나, 한글 소설이란 증거는 전혀 없다. 다카하시의 제자였으며 훗날 남로당 간부가 된 국문학자 김태준은 1933년 '조선소설사'에서 계급 타파와 적서 차별 폐지, 빈민 구제, 새 사회(율도국) 건설 등을 내세운 허균의 '사회 혁명적 소설'이 '홍길동전'이었다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김태준의 해석을 1990년대까지 학계에서 사실상 그대로 계승했다"고 말했다. 반역죄로 사형당한 허균이 세상을 뒤집는 책을 썼다고 믿고 싶은 데다, 한글 소설의 시작이 200년 올라간다는 '애국적' 연구 태도도 한몫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서민들이 즐겨 읽는 대중서였던 '홍길동전'에서 양반 사회 내 문제인 적서 차별은 캐릭터적 설정이었을 뿐, 주인공은 결국 체제에 순응했으며, 율도국 이야기는 재미를 위한 '액션 신'이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금서가 됐다'는 것도 사실무근입니다. 조선 정부는 한글 소설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는 "전공자들은 이미 '홍길동전'의 저자가 누군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은 아직도 허균이 쓴 책이라고 오해하고 있어요. 한글 소설이 지식인이 아니라 서민의 장르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