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출판계의 살아있는 전설' 나춘호(76) 예림당 회장이 현업으로 복귀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2005년 아들(나성훈 티웨이항공 대표)에게 대표직을 물려준 이후 13년 만이다. 국내 출판 시장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결정이다. 지난 5월부터 의사 결정에 참여, 8월 30일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예림당은 국내 학습만화계의 스테디셀러인 'Why?' 시리즈, 유아용 브랜드인 '스마트베어'로 유명한 아동 도서 전문 출판사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재미있는 책으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예림당 사옥에서 만난 나 회장은 "예림당은 제 혼(魂)이 담긴 회사"라며 "경영에서 물러났을 때에도 늘 마음은 회사와 함께하며 응원을 잊지 않았다. 앞으로도 늘 정도를 지키며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아동 도서 출판 외길… 창작동화 엮어 책 내
대구 출신인 나 회장은 1967년에 서울에 올라와 1973년 아동 출판 도서 전문 예림당('예술의 숲'이라는 의미)을 설립했다. 처음부터 아동 도서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경험이 한몫했다. 어린 시절 혹독한 가난을 경험한 그는 그것을 벗어날 길이 오로지 배움에 있다고 봤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가정형편상 책 한 권 살 여유가 없었다. 이에 그는 나중에 자신처럼 어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을 위한 좋은 책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서울에서 지내던 하숙집 이웃의 권유로 우연히 월부 책 장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는 매일 벼랑 끝이라고 생각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 덕분에 5년 후에는 영업사원에서 출판사 사장으로 승진했고, 그 이듬해에는 직접 출판사를 차리기에 이른다. 그리고 당시 출판계의 관행과는 다른 행보로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외국 책을 사다가 적당히 베낀 전집을 만들어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지만, 저는 그러한 길로 가지 않았어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좀 더 품을 들여서 좋은 책을 만들고자 노력했죠. 원고료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아동문학작가를 일일이 찾아가 책을 만들자고 설득하고 원고료도 드렸어요. 어린이들에게 맞는 책을 한국적인 요소로 만들자는 것이 회사의 방향이었습니다."
그는 책을 만들 때마다 '어린이 헌장'을 떠올렸다. 1957년 동화작가인 마해송, 강소천 등 7명이 성문화해 발표한 '어린이 헌장'은 어린이의 권리와 복지, 바람직한 성장상을 제시해 사회가 이를 지켜주고 키워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초심은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의 우수한 창작동화를 모아 발표한 '100년 후에도 읽고 싶은 한국명작동화' 시리즈다. 1923년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 문화의 꽃을 피운 선구자 방정환으로 시작해 2005년 등단한 배유안 작가의 작품 중에서 좋은 작품을 추려 각 권당 약 30편씩 모두 84편을 세 권에 수록했다. 첫 번째 권(1923~ 1978년)과 두 번째 권(1978~1991년)에 이어 지난달 발표한 세 번째 권에는 1991년부터 2010년까지 등단한 작가의 작품이 담겨 있다. 1권은 15만부 이상 팔리며 작품성과 인기를 모두 인정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인 마해송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이 발표된 지 벌써 100여 년이 돼 가는데, 이러한 오랜 역사에도 우리나라 동화문학의 성과를 집대성하는 작업이 지금껏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에 지금까지 읽혀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읽힐 우리 동화들을 명작화한다는 의미에서 시리즈를 기획했죠. 모쪼록 이 책이 현재는 물론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도 읽혀 끊임없이 빛을 발하는 우리나라 동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독서해야 아이도 책 즐겨
나 회장은 복귀에 대해 '설렘 반 걱정 반'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책을 현장에서 직접 만든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지만, 최근 시장 상황이 마냥 낙관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과 모바일이 발전하면서 어린이 독자들이 대거 동영상 시장으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우려가 깊다. 이에 그 역시 '읽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전환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동영상 제작팀을 새롭게 꾸려 Why? 시리즈 내용을 짧은 분량의 동영상 콘텐츠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Why?는 단순한 학습만화책이 아닌 원리를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주는 양서(良書)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작의 가치를 최대한 살려 동영상을 만드는 중입니다. 최고의 질이 나올 때까지 시장에 섣불리 내놓지는 않을 계획이지만, 공개되면 Why? 시리즈 첫 권이 세상에 나왔을 때만큼 큰 관심을 끌 것이라 확신합니다. 요즘 유튜브 등에 유해한 영상들이 너무 많은데, Why? 동영상 콘텐츠가 조금이나마 이러한 흐름을 막는 역할을 하면 좋겠네요."
그는 부모를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 회장은 "아이가 독서를 즐기려면 부모가 먼저 책을 읽어야 한다"며 "어린이들의 정서를 풍부하게 살찌울 수 있는 양서를 부모가 즐기면 아이도 분명히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