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안병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지요. 그러니 때아닌 눈서리가 내릴 때는 곁의 여인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녀 인생의 빼앗긴 봄을 되찾아 줄 방법은 뭘까요?

홍여사

학원에서 아이를 싣고 집에 돌아오니,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이 거실에 나와 있더군요. 피곤해 죽겠다던 사람이 그새 티브이에 빠져 있습니다. 뭔가 싶어 다가갔다가, 조금 놀랐네요. 남편이 보고 있는 건 뜻밖에도 달달한 가상 연애 예능 프로. 마침 남성 출연자가 여성 출연자에게 꽃다발과 편지를 건네고 있는데, 그걸 보고 남편 입이 헤벌어져 있는 겁니다. 오글거린다며, 아내 생일에도 카드 한 장 안 쓰는 사람이 이런 건 또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런데 그 순간 남편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의 말 한마디가 흘러나오더군요.

"띠동갑이라니, 땡잡았네. 부럽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지고 입술이 뾰족해지더군요. 생일이 열 달 늦은 동갑내기 남편한테 억울하게 누나 소리 들으며 살다 보니, 제가 숫자에 좀 예민하거든요. 더구나 남편은 나이를 핑계 삼아 궂은일은 제게 떠넘기는 사람입니다. 쿨하게 이해해 달라, 자유롭게 풀어 달라, 너그럽게 참아 달라고 요구할 때도, 애꿎은 나이를 전제에 깔지요. 그런 사람이 지금 뭐라고요? 띠동갑이 부럽다고요? 누가 할 소릴…. 저야말로 살면 살수록 띠동갑이 부럽습니다. 나도 자상하고 듬직한 오라버니를 신랑으로 만나 투정도 부리고 귀염도 받으며 살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랬더라면, 저 대책 없이 엄살만 많은 남자는 어느 여자가 거두었을까요? 아마 띠동갑 연상의 여인이지, 연하의 여인은 아닐 겁니다.

"그러게, 부럽네! 나도 다음 생에는 나이 지긋한 남자 만나서 공주 대접 받으며 살아봐야지."

남편 옆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내가 괜히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여 말했습니다.

"당신도 꼭 띠동갑 어린 아내 만나 알콩달콩 잘 살아."

"아, 네, 누나. 그러려고요."

부부간의 대화는 참 이상합니다. 내가 먼저 시작해놓고, 기대와 다른 답이 나오면 기분이 팍 상합니다. 더 이상 말을 말자 싶으면서도, 입 다물고 물러설 수는 또 없죠. 그날도 저는 기어이 내 몫의 가시 돋친 대사를 던지고야 말았죠.

"그런데 아저씨~ 어린애 데려다, 나한테 하듯 이런 식으로 하면 다 도망가요."

"걱정 마요 누나~ 나도 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거니까요."

"……!"

우리의 위험한 만담은 거기서 뚝 끊기고 말았습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내가 만만해서, 나에게는 막 대한다는 뜻인가요?

제가 아는 남편은 엄마처럼 챙겨주고 받아주는 여자가 아니면 오래 만날 수 없는 남자입니다. 누가 먼지 털고 방석 깔아줘야 털썩 앉는 사람이고 옆 사람이 아픈지 고픈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념일이나 생일을 자기 머리로는 절대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평소에 고맙다 미안하다 소리도 오글거려서 못 하는 사람. 자기는 걸핏하면 신경질 내고 투덜거리면서, 남의 고충은 5분도 못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헤어짐을 생각하지 않고 여태 살아온 건, 본인도 어쩌지 못하는 남편의 성격이 워낙 그런 거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나나 되니까 이만큼 맞추고 살아왔지, 다른 여자하고는 삼 년도 살아내지 못했을 거라 믿었고, 남편도 그 점은 고맙게 여길 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가 봅니다. 남편은 내가 무한 만만했을 뿐이고, 이젠 그 만만함이 싫증이 나려는 모양입니다.

돌이켜 보면 남편은 처음부터 저를 지나치게 편안해했습니다. 결혼하자고 조를 때도 엄마한테 뭐 사 달라 보채는 식이었지, 제 환심을 사려는 달달한 노력 같은 건 없었죠. 그러고 보니 최소한의 프러포즈 흉내조차 내지 않았네요. 이벤트는 고사하고, 눈 맞추며 진지하게 '결혼하자' 말한 적도 없으니까요. 벌써 이심전심 다 통한 것처럼 자기 멋대로 결혼을 기정사실화해버렸죠. 그때는 그게 서운한 건지도 몰랐습니다. 남편의 성격이 워낙 '시크'해서 그런 거라, 이해했지요. 그랬던 것이, 오히려 나이 먹어갈수록 아쉬워지더군요. 결혼 생활이 막막하고 외로울 때, 혼자 미소 지으며 떠올려 볼 행복한 순간이 없으니 말입니다. 저는 울컥하는 기분을 애써 감추며, 남편 옆구리를 한 번 더 쿡 찔러봤습니다.

"띠동갑 아내 맞으려면 프러포즈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당신 그런 거 자신 있어?"

"그까짓 거, 왜 못 해? 소싯적에 다 해봤는데. 카페 빌리고 반지 감추고 별짓 다 했었지."

이건 또 뭔가요? 저는 뒤통수를 세게 한 방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남편도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그럼에도 나한테는 안 해준 거라니….

아, 이 순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도 소싯적에 별거 다 받아봐서, 원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네요. 남편 이전의 남친이나, 저를 따라다니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저에게 기억에 남을 이벤트를 해주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전, 누가 봐도 만만한 여자였나 봅니다. 남자를 안달 나게 할 줄 모르고, 그저 편하게만 해주는 여자. 다시 태어나면 절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계절은 이미 가을이고, 우리 인생에 두 번째 봄은 없겠지요?

티브이 화면에서는 시작하는 연인들이 수줍게 손을 맞잡고 있더군요. 그 순간 저는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를 톡 꺼버렸습니다. 어이없어하며 쳐다보는 남편을 두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두고 봐. 만만한 여자의 뒤끝이 얼마나 긴지 이제부터 알게 될 거야.

눈 흘기며 등 돌리기엔 너무 아름다운 이 계절에, 저는 이렇게 독한 앙심을 품어봅니다. 며칠이나 갈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