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뉴스를…' 성역 허물고 50년 시사 앵커로
"오래 버텨야죠. 쓸만한 여자가 없다는 소리 들어가도록"
국내 최초의 여성 시사 앵커 박찬숙(74) 씨가 후배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그는 1968년 KBS 아나운서 공채 1기로 입사해 지난해 말까지 50년간 방송 활동을 했다. 한국 TV 뉴스 사상 최초로 9시 뉴스 진행을 맡았고, ‘심야토론’, ‘라디오 정보센터 박찬숙입니다’. ‘생방송 박찬숙의 쟁점’ 등 수많은 시사 프로그램을 단독 진행했다. 남성 방송인 가운데도 이런 경력을 지닌 이는 드물다.
현대사의 격동기를 함께 하면서 5공 시절 강제해직을 당하기도 하고, 진보 정권 시절 자신이 맡고 있던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등 크고 작은 시련도 겪었다. 2004년에는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해 정치 활동을 했으며, 소설가, 사진작가로도 활약했다.
◇ ‘여자가 뉴스를…’ 성역 허물고 50년 시사 앵커로
박찬숙은 1968년 대학 졸업을 하던 해에 KBS 공채 1기 아나운서가 됐다. 면접시험 마지막 질문이 ‘그해 우리나라 인구증가율이 몇 %인가’하는 것이었는데, 0.1초도 안 돼 2.88%라고 답변해 남성 시험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처녀가 인구증가율을 답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시대였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지닌 동료들 사이에서 굵고 힘 있는 박찬숙의 음성은 단연 튀었다. 연수를 마치고 나니 선배인 고 강찬선 아나운서가 "아가씨 큰일 났어. 너무 못해"라며 걱정했다. 하지만 남다름은 장점이 됐다. 당시만 해도 여성 아나운서에게는 콜사인(시각 알리기)이나 어린이 프로그램, 주부 프로그램 등을 맡겼지만, 박찬숙은 대담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첫 방송을 마치고 아나운서실로 돌아오니 강 선배가 그래요. ‘박찬숙, 정말 잘했어!’"
1976년 밤 9시 뉴스를 맡으면서 ‘여성 앵커 1호’가 됐다. 남성 옆에서 자잘한 뉴스를 처리하는 작은 역할인데도, 남성 앵커들의 반발이 거셌다. "신뢰도가 떨어진다",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할 건데 어떻게 여자와 뉴스를 할 수 있나?" 등 별별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파급효과는 컸다. "제가 9시 뉴스를 맡고 나서 경쟁사인 MBC, TBC가 잇따라 여성을 뉴스에 등장시켰어요. 그후 TV 뉴스에서 여성이 사라진 적은 없죠."
방송계가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 앵커는 남성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중년 남성 앵커와 젊은 여성 앵커가 나란히 앉아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도 익숙한 풍경. 얼마 전에는 한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박찬숙은 후배들에게 ‘버티라’고 한다. "여성 앵커들이 오래 버티는 수 밖에 없어요. 쓸만한 여성 앵커가 없다는 평이 나오지 않도록. 비주얼만 강조하거나 여성성만을 내세워서도 안됩니다."
◇ ‘보이는 방송, 만져지는 뉴스’ 명쾌한 통찰로 입지 구축
인터뷰 당일, 그는 낡은 수첩을 하나 갖고 나왔다. 1994년 7월, KBS 제1 라디오의 ‘라디오 정보센터’를 시작할 때 사용한 수첩이다. "첫 방송 하는 날이 몹시 더웠어요. 그래서 ‘시원한 뉴스, 보이는 방송, 만져지는 뉴스가 되도록 하겠다’고 오프닝 멘트를 했죠." 라디오를 만지고 보겠다니, 그만큼 생생하게 사회를 통찰해 보이겠다는 포부였을 터.
다짐은 현실이 됐다. 민감한 사회문제나 어려운 정치 문제들을 쉽고 명쾌하게 풀어내 "시원하다"는 호평을 얻었다. 대낮에, 그것도 여자가 시사 프로그램 MC를 맡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있었지만, 9년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박찬숙은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을 함께 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현장, 노태우 민정당 대표 시절의 6·29 선언, 북한 연형묵 총리 방문 7·4 공동성명 합의 서명, 1998년 제2차 걸프전 등을 생중계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김운용 IOC 위원, 진념 재경부장관, 김동연 경제부총리 등. 이 가운데엔 ‘단지 박찬숙이기 때문에’ 부응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인터뷰어의 덕목은 무엇일까? "상대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되, 그걸 아는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질문은 짧게 해야죠." 그럼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일단 잘 들으세요. 상대의 말 속에 질문이 있습니다. 질문지를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어요. 때론 좋은 연사가 좋은 질문자를 만들기도 합니다. 제게는 이헌재 전 부총리, 진념 전 부총리가 그런 분이었죠."
◇ 어린 시절 꿈은 영화감독, 이젠 쓰고 찍는 일에 전념할 것
그는 지난해 12월 경기방송 ‘세상을 연다, 박찬숙입니다’를 끝으로 50년 방송 생활을 마감했다. 하지만 여전히 4시 반이면 기상해 신문을 정독하고 뉴스를 살핀다. "지금도 뉴스를 안 보면 불편합니다. 책을 읽다가도 어느 순간엔 뉴스에 뭐가 나왔나 찾고 있죠."
말에 능한 사람은 글에 둔한 법이라고도 하지만, 박찬숙은 두 가지 재능을 고루 갖춘 사람이다. 1992년 동서문학 신인상에 소설 ‘파꽃과 꼬리’가 당선돼 등단했으며, 2011년과 2014년에는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남산타워 꼭대기에 걸친 보름달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2시간 넘게 기다린 적도 있다. 사물 뒤에 숨은 본질을 찍는 혜안, 아마도 그것은 50년 앵커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으리라.
어린 시절 박찬숙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최근에는 영국 록밴드 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세 번이나 봤다.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향해가는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어요." 영화 속 감흥에 젖어 있는 그에게서 청년의 순수한 열정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는 앞으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일에 전념할 생각이다. 또 어떤 결을 포착해 보일까. 그리고, 이제 방송은 끝난걸까? "제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기꺼이 응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