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백건 사회부 법조팀장

요즘 대법원 청사 1층 출입문 앞에선 기자들이 진(陣)을 치고 김명수 대법원장의 출·퇴근을 기다린다. 법관대표회의가 지난 19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재판 거래' 의혹에 휘말린 판사들의 탄핵을 국회에 요구한 것에 대한 대법원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은 아무 말 없이 취재진을 지나치고 있다.

탄핵 촉구안이 나온 날, 김 대법원장은 촉구안을 낸 법관대표회의 판사들과 만찬을 했다. 그가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한 안철상 대법관은 법조인들과 만찬 모임에 예정대로 참석했다. 한 원로 법조인은 "사법부가 대혼돈에 빠진 날 이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한다는 게 신기했다"고 했다.

이날 오전 박병대 전 대법관은 검찰에 소환됐다. 차한성 전 대법관은 지난 7일 검찰에 불려갔고, 고영한 전 대법관은 이달 23일 불려간다. 전직 대법관들이 줄줄이 검찰 소환 조사를 받는 것 역시 '판사에 의한 판사 탄핵' 요청처럼 전례(前例) 없는 일인데도 대법원은 조용하다.

지난 8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주도해 '재판 거래' 의혹 사건을 맡을 특별재판부의 설치 법안을 발의했을 때도 비슷했다. 판사들 사이에서 "사법권 침해다"라는 의견이 비등했다. 정치권의 공세에 맞선 사람은 김 대법원장이 아니라 황병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였다. 그는 법원 내부 온라인망을 통해 "절대주의 국가처럼 국왕이 담당 법관을 정하거나 하면 재판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대법원에서 열린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서 "지난 정권의 사법 농단 의혹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실상 사법부에 '검찰 수사에 협조하라'고 한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이 자리에서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한 술 더 떴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판사들 사이에선 "대법원장 리더십은 불구경 리더십이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사법부를 뒤흔드는 초유의 일들이 연이어 터지는데 남의 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얘기다. 탄핵 대상으로 실명(實名)이 거론되는 판사들, 검찰에 줄소환되는 전직 대법관들은 결국 '양승태 사람들'이고, 특별재판부 설치 역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일로 여기는 듯하다는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판사들과의 모임 등에서 "너는 누구 편이냐"는 말을 종종 한다고 한다. 그가 사법부를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서 보고 있다고 느끼는 판사가 적지 않다. 실제 대법원과 서울중앙지법, 전국법관대표회의는 그가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이 장악하고 있다. 대법원장의 침묵에 정말 그런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라면 그는 사법부 수장(首長)이 아니라 연구회 수장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