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 기자

"때마침 장맛비가 내리면 드넓은 강물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조각배가 물 위에 떠 흔들흔들 가는 듯도 하고 오는 듯도 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1764~1845)는 '천주타운(天柱朶雲·관악산 봉우리에 늘어진 구름)' '율서어증(栗嶼魚 ·밤섬의 고기잡이 그물)' 등 서울 한강 주변에서 가장 뛰어난 경치인 '한강팔경'을 꼽으며 그중 하나로 '노량요정(露梁遙艇)', 즉 '노량진의 흔들리는 조각배'를 들었다(노량의 鷺는 예전엔 露자로도 썼다).

옛적 노량진은 이처럼 동양화 풍경 같은 한적한 강변 마을이었다. 한양 도성을 나와 과천·시흥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나루터(노들나루)가 있었지만 지금의 교통량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조선 초 도성 내에서 처형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누군가 배를 타고 옮겨 몰래 묻은 곳도 노량진이었는데, 시신을 옮긴 사람이 김시습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성삼문 조카였다는 말도 있다. 19세기에는 '노량진 풍류회'라는 단체가 역사에 등장하는데 그 정체는 일종의 무당협회였다. 조정에서 무당을 성 밖으로 쫓아내는 정책을 쓰자 한강을 건넌 무당들이 노량진에 모여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한 계(契)를 만든 것이다.

노량진 구(舊)수산시장의 옛 모습. 1971년 의주로에서 노량진으로 이전했다.

1899년 경인선 개통과 함께 한때 시종착역이 되면서 노량진은 '배의 마을'에서 '철도의 마을'로 바뀌고 교통의 요지로 변모했다. 한강철교(1900)와 한강 인도교(1917)가 개통돼 강북과도 연결됐다. 6·25전쟁 때는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몇몇 피란민은 배를 타거나 헤엄쳐 노량진으로 건너갔다. 전쟁 중에는 도강증(渡江證)이 있어야 강북으로 건너갈 수 있었는데, 피란길에 가족이 흩어진 화가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은 노량진 강변에서 자갈 깨는 일에 나섰다가 간신히 도강증을 얻어 남편과 상봉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고시촌과 수산시장이 생기면서 노량진은 두 얼굴을 지닌 독특한 공간이 됐다. 노량진 전철역을 나와 왼쪽으로 육교를 건너면 '컵밥'을 비롯해 싼 가격과 빠른 식사라는 특징으로 고시생에 최적화된 끼니를 파는 노점이 즐비했고, 오른쪽으로 구름다리를 건너면 생선 냄새 물씬한 시장과 횟집이 들어찬 낡은 건물이 있었다. 구(舊)시장이 단전·단수됐다는 소식은 이제 그 추억마저도 역사 속으로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