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경제학자

일본의 근대를 만든 것은 번역의 힘이라고 알고 있다. 일본어만 알고도 세계의 동향을 알 수 있도록, 일본은 정말이지 열심히 번역을 했다. 그런 건 정말 부럽다. 나에게도 가끔 프랑스 경제학 책 번역 의뢰가 온다.

강사 시절에는 별의별 걸 다 번역하면서 지내던 때가 있었다. 그해에 나온 프랑스 책 중에서 경제 관련된 것은 거의 다 내가 번역할 정도였다. 뭐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하던 시절이다. 이제는 하기 어렵다. 콜론과 세미콜론, 반복되는 복잡한 대명사 구조, 몇 개는 다시 명사로 받아줘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재구성해서 짧은 우리말로 만들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글이 된다. 프랑스어 번역은 조금만 복잡한 경제 얘기가 되어도 할 사람이 없다고 아쉬운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의미만으로 노력 봉사하기는 어렵다. 매번 안타깝다.

박산호는 요즘 '핫'한 번역가다. 노승영·박산호의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이라는 에세이집을 통해서 한국 번역가의 우여곡절 사연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과학책과 스릴러 소설 분야 같은, 그나마 좀 버티는 분야의 번역가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눈물 날 뻔했다. 쥐꼬리만 한 돈도 "영혼은 너덜너덜해진 후"에야 겨우 받는다. 중소기업에서 어음 돌리는 관행 보는 듯했다.

박산호의 신작 에세이집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북라이프)는 나름 잘나가는 번역 전문가의 득도기 혹은 해탈기와도 같다. 잘난 체하는 숱한 '어른들' 속에서 '거절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 눈물겹다. 딸의 엄마로 살아남으며 '돈 많은 힘센 어른'이 아니라 '느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결론을 보면 가슴이 숙연해진다. 한국에서 번역을, 아니 프리랜서로 20년쯤 되면 저 경지에 도달하는가? 여기에 비하면 나는 편하게 그리고 날탕으로 살았다는 반성마저 들었다.

잘난 사람의 "나처럼 해봐요, 요렇게", 여기에 진력난 한국 사회다. 딸을 키우며 온몸으로 버텨낸 세월이 주는 '작은 성공'에 기뻐하는 삶이 깊은 공감을 준다. 잘나서나 강해서가 아니라 진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가가 더 많아지면 좋겠고, 이런 책들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 지식 경제라고 하는데, 지식을 현장에서 담당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는 경제 구조는 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