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은 유럽 정상들을 만났을 때 대북 제재 완화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바로 'CVID'입니다. 유럽 정상들은 한목소리로 '완전하고(complete), 검증 가능하며(verifiable),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북한의 핵 폐기(dismantlement)'를 강조했습니다. CVID는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 당시에 수립한 북핵 문제 해결의 원칙. 지난 4월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지난 6월 열린 미·북 정상회담에서도 초점은 회담 합의문에 CVID가 들어가는지 여부였습니다. 결국 두 회담 모두 합의문에 CVID가 빠졌습니다. 북한이 이 표현의 삽입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그 때문에 미국도 CVID 대신 FFVD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세계는 관철하려 하고 북한은 질색하는 걸까요. 사실 미국 정부는 CVID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쓰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다행히 CVID가 궁금할 이들을 위한 가이드가 있습니다. 지난 5월 말 미국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에서 나온 보고서 '기술적 관점에서 본 북한 비핵화 로드맵'입니다. 북한 핵 문제에 관한 최고 전문가로 불리는 핵물리학자 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교수 주도로 작성된 보고서입니다. 그간 나온 그 어떤 북핵 문건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CVID, 10년 걸린다

보고서의 핵심 결론이 가장 충격적입니다. 헤커 박사는 북핵의 완전한 폐기까지 최소 10년이 걸릴 것이라고 봅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요. 첫째 핵무기를 만든다는 건 그야말로 방대한 사업이고, 둘째 북한 핵무기는 사실상 완성 단계에 있으며, 셋째 북한 협조 없이는 제대로 된 핵 폐기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비관적인 시간표는 경험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헤커 교수는 2010년 북한의 초청으로 영변 핵시설을 방문했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핵무기 원료인 고농축 우라늄(HEU) 생산 시설을 전격 공개한 겁니다. 미국은 2002년부터 북한이 플루토늄 외에도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든다는 첩보를 접하고 의심을 품었지만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북핵, 정확히 뭘 없애야 하나

헤커 박사는 북핵 CVID가 이뤄지려면 크게 8개 카테고리, 세부적으론 22개 항목에 걸쳐 폐기 절차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분석합니다. 또한 8개 카테고리에 대한 폐기 절차를 기간별로 단기(1년 소요), 중기(2~5년 소요), 장기(6~10년 소요)로 제시합니다. 헤커 박사는 CVID를 하나의 차트로 그리고 독특한 분석을 가미합니다. 총 66개 항목 중 비교적 위험이 적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눈 겁니다. 그는 위험이 높은 항목, 즉 그만큼 난도가 높은 과제는 붉은색으로 표시하고 위험과 난도가 낮은 과제는 푸른색으로 표시했습니다.

북한, 핵 포기 의지 있나

헤커 보고서의 장점은 북한이 핵 폐기 절차에 돌입했다고 주장할 때 그들이 한 행동을 차트와 비교·검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지난 5월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대단한 핵 폐기 절차를 진행한 것처럼 내세웠지만, 헤커 보고서의 총 66개 비핵화 단계 중 비교적 쉬운 핵실험 시설 해체를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금 북한이 밟았다는 핵 폐기 절차는 위험이 낮고 쉬운 게 전부입니다. 66개 단계 중 초기 3단계, 그것도 일부를 이행했을 뿐이죠. 반대로 고난도 과제는 전면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핵무기 및 미사일 리스트 신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난 6월 미·북 정상회담의 후속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절차를 이행하지 않으니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핵 폐기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의 '과속 스캔들'을 우려하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