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중 의학전문기자

선진국 어디를 가봐도 서울아산병원처럼 어마어마한 곳이 없다. 하루 외래 환자 1만2000명이다. 한 해 입원 환자는 100만명에 가깝다. 지난해 수술은 6만4000건이다. 전 세계 간 이식 기술을 주도하고, 심장 관상동맥 치료를 선도한다.

현대그룹을 일군 창업자 정주영 이사장의 역동성이 이어진 걸까. 설립한 지 20여 년 만에 세계 최고, 최대 수준 대형 병원이 됐다. 국제 의료계에 이런 역사가 없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있다. 엄청난 자원과 기술을 갖고서도 의료 기술 회사나 바이오벤처를 출범시키지 못했다. 비영리 기관인 대학 병원이 회사를 창업해서는 안 된다는 규제 탓이다. 이는 다른 대학 병원도 모두 해당한다.

반면 미국은 다르다. 유명 병원 메이오 클리닉은 의료 기기, 진단, 치료, 헬스 IT 등에서 회사 85곳을 만들었다. 기술을 이전해 지분을 20~50% 취득한 회사도 81곳이다. 병원이 고용한 특허 전문 변호사가 원내 콘퍼런스를 돌아다니며 신기술을 수집한다. 의사들이 기술과 아이디어를 들고 창업 센터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병원이 회사를 세운다.

그렇게 해서 특허 5500건이 병원서 나왔고, 그중 절반이 상용화됐다. 클리블랜드 클리닉도 이노베이션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70여 의료 기술 회사와 발명을 3400건 쏟아냈다. 좋은 특허 낸 의사를 괜찮은 논문 쓴 의사만큼 대우한다. 병원이 산업화로 얻은 수익은 환자 진료에 쓰고, 첨단 기술 개발 투자로 이어진다. 선순환 구조다. 이 병원들 모두 비영리 기관 대학 병원이다.

우리는 생명과학 분야에서 좋은 자원을 갖고도 좀처럼 성장하질 못하고 있다. 변변한 글로벌 신약도 나오질 않고, 굴지의 의료 기기 회사도 없다. 남들 다 하는 원격의료는 수년째 논란 중이다. 의료 접근성이 좋아서 필요 없다는 논리다. 그럼 공중전화 많은데 휴대전화는 왜 필요한가. 처방전을 아직도 손으로 쓰는 의사가 많은 일본도 원격진료를 도입해 건강보험까지 적용한다. 원격의료 회사가 속속 등장해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다. 한국은 최고의 IT를 갖고 있다면서 갈라파고스 섬으로 남아 있다. 그러기에 같은 그룹의 삼성전자와 삼성서울병원이 합작한 IT 헬스케어 회사가 없다.

한국 대학 병원의 진료 자료는 감춰진 보물이다. CT·MRI 영상 진단부터 수술 후 분자·병리조직, 유전체 분석까지 꼼꼼히 재워져 있다. 인공지능 기반의 새로운 진단과 치료법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토대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까다로운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비식별 정보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 줄기세포를 키워서 자기가 맞는 것도 한국선 안 된다. 미국·유럽·일본선 난치병 환자들에게는 줄기세포 시술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병원에서 연구 목적 외에 유전체 검사, 장내 세균 마이크로바이움 검사, 면역세포 활성도 검사를 할 수 없다. 노벨상을 가져다 주고, 앞으로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이 세포 치료제인데, 한국에선 곳곳에 선택 제한이 있다.

생명과학과 대학 병원에는 우수한 인재와 자원이 몰려 있다. 우리에게 삼성전자와 같은 회사가 나오길 기대할 수 있는 곳은 바이오·의료 분야라고 본다. 전 세계가 고령 사회로 가고 있고, 이는 건강관리 산업의 확대와 번성을 의미한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쥐고도 보석을 만들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한국인 특유의 역동성과 혁신성으로 생명과학 산업을 키워가야 할 때다.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 아니다. 엄격한 잣대, 까다로운 절차로 선진국 흉내만 내면 언제 선진국이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