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결은 일본 기업의 배상 갈등을 넘어 한·일 관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1965년 국교 정상화의 전제로서 타결된 일명 '청구권 협정'의 근간을 흔드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근거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에 의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 협정이 식민지 불법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이 아니라 재정·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밝혔다. 강제 노역에서 못 받은 월급 등 미수금 청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日외무상, 주일대사에 항의… 내·외신 기자 수십명에게 이례적 공개 - 고노 다로(가운데) 일본 외무상이 30일 일본 도쿄 외무성 청사로 이수훈(맨 오른쪽) 주일 대사를 불러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항의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이 모습은 내·외신 기자 수십 명에게 공개됐다. 고노 외무상은 이날 대법원 판결 직후 담화를 통해“매우 유감이다.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대로 청구권 협상이 명목상으론 재산 청구권에 한정됐던 것이 사실이다. 이 협정이 승전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의 후속 협상 형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한국은 강화조약 당시 승전국 지위를 얻지 못했다. '한국은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는 영국의 주장이 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은 승전국 자격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아닌 구 식민지 자격의 재산 청구권만 인정받았다. 식민지 배상을 요구해온 이승만 정부도 강화조약을 기점으로 배상권을 사실상 포기했다. 승전국이 인정하지 않는 배상 요구를 일본이 받아들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배상은 식민 지배 자체가 불법이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의미도 있다. 당시 미·영·불 등 핵심 승전국은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였다.

1965년 청구권 협정은 이런 한계 속에서 성립됐다. 한국 정부는 배상 요구를 거두는 대신 금액을 늘리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명분을 접고 실리를 택한 것이다. 일본은 명목을 '경제협력'으로 한다면 금액을 늘릴 의사가 있다고 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타협의 상징이었다. 그 결과, 청구권 협정엔 '배상' 문구가 담기지 않았다. '자금(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 지급'을 약속한 1조와 '청구권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명기한 2조 사이에 연관성도 부여하지 않았다. 액면 그대로 보면 일본은 대가 없이 돈을 주고 한국은 대가 없이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다.

1962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왼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청구권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영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은 국회에서 "이 자금에 배상적인 성격이 있다"고 말했다. "보상금을 국가 자격으로 청구하니 개인에 대해선 국내에서 처리하겠다"는 당시 한국 대표단의 발언도 남아 있다.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에도 '대일청구요강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최종 해결됐다'고 명시했다. 이 범위에 '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 청구'가 포함됐다. 이 문구 등을 토대로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역시 징용 피해자 보상은 청구권 협정에 포함됐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한국 국민 세금으로 징용 피해자 7만여명에게 6200억원에 달하는 위로금을 지불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런 역사적·정치적 경위를 고려하지 않고 청구권 협정이 명목상 재산 청구권에 국한됐다는 이유를 들어 식민지 불법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번 판결로 한국 정부는 큰 짐을 지게 됐다. 2013년 서울고등법원은 파기환송심에서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은 (청구권 협정으로) 포기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30일 대법원은 이 판결문을 확정했다. 앞으로 한국 정부는 배상청구권을 가진 국민을 대신해 일본 정부에 대해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해야 한다. 식민지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게을리할 경우 또 다시 위헌 판결을 받을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권을 인정해 놓고 이들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 행사를 게을리했다가 피해자들의 헌법 소원을 부른 일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행정 부작위(不作爲·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일부러 하지 아니함)'에 따른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로 이어진 역사 갈등과 파동의 시작이었다.

신각수 전 주일(駐日) 대사는 "청구권 협정과 상충된 판결이 나온 이상 일본은 한·일 국교의 기본 체제가 무너졌다면서 강하게 반발할 것"이라며 "그렇다고 우리 정부가 대법원 판단을 거스를 수도 없으니 운신의 폭이 좁아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와 전후 보상을 논의하며 1965년 6월 22일에 조인한 국제조약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후속 조치로 1951~1965년 14년 동안 협상했다. 일본은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지급하기로 하고, 한국은 일본에 대한 모든 청구권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