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6일 서울 강남구의 한 다세대주택 앞에서 20대 여성 A(22)씨가 무참히 살해됐다. 이혼 조정 중이던 남편 조모(24)씨가 휘두른 칼에 20여차례 찔린 뒤였다.
짧은 결혼 생활 내내 A씨는 남편의 상습 폭력에 시달렸다. 수시로 목이 졸리고 얻어맞고 칼로 협박당했다. 참다못해 집에서 뛰쳐나와 이혼 절차를 밟기 시작했지만 남편은 되레 자살 협박과 스토킹을 일삼았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소용없었다. 살해당하기 하루 전 A씨는 어린 딸을 보러 갔다가 별거 중인 남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 현장에서 빠져나와 경찰에 신고했지만 몇 시간 만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남편이 신고 소식을 듣고 A씨 집으로 쫓아와 흉기를 휘두른 것이다.
이 사건은 지난 22일 강서구 아파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사건과 판에 박힌 듯 똑같다. 피해자가 폭력에 못 이겨 이혼한 뒤 스토킹에 시달리다 살해당하는 구도다. 경찰을 불러봤자 소용없었다. 되레 "네가 나를 신고했다"며 더 처참하게 맞다가 죽어서야 해방됐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한 사람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동안 국가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부부 폭력 집계도 안 하는 나라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살해)'는 평범한 여성들이 연애·동거·혼인 상대 남성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말한다. 우리 정부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정 폭력 근절 대책' '데이트 폭력 방지 대책'을 내놓지만 실제로는 피해자 규모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살인의 경우 연인이 범인인 경우만 통계에 잡힌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05~2014년 10년간 전체 살인범 열에 하나가 연인(1만283명 중 1059명)이었다. 남편이 범인이면 '동거 친족', 전 남자 친구나 전·현 동거남이 살해하면 '지인' '기타' '타인' 같은 항목에 들어가 있어 집계가 불가능하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전·현 배우자나 연인에 의한 폭력을 '친밀한 파트너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으로 규정하고 정밀하게 집계해 대책을 세운다. 이웅혁 교수는 "실태를 파악해야 대책을 세울 텐데 우리는 실태 파악도 안 한다"고 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남편이 가해자인 경우까지 합치면 전체 페미사이드 피해가 연인이 살해한 경우의 두세 배에 달할 것"이라고 했다.
◇여성계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처벌법'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했다. 남을 때리면 '형법'에 따라 경찰이 출동하지만, 아내를 때리면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라 상담·교육·사회봉사 같은 '교화' 처분을 받는다. 법원이 100m 이내 접근 금지나 전화 통화 금지 같은 '임시 조치'를 내리지만 어겨봤자 과태료 300만~500만원만 물면 끝이다. 폭력 정도가 심각해도 가해자가 상담을 받겠다고 나서면 기소가 유예된다. 김재련 변호사는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도 눈앞에서 칼부림이 나거나 피가 철철 나지 않는 한 '가정사'라며 개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작년 9월 경북 경주에서 남편이 아내 머리를 돌로 10여 차례 마구 내려친 혐의로 구속됐다. 남편은 두 달 전에도 집안 물건을 마구 부수고 자살 협박을 하며 소동을 부렸지만 경찰이 "가정 폭력이 아니라 재물 손괴"라며 되돌아갔다. 지난해 7월 경기도 광주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뜨거운 물을 뿌려 아내가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남편이 "물을 뿌렸을 뿐 폭행은 안 했다"고 하자 경찰이 그대로 돌아갔다. 이 남편은 2015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가정 폭력으로 경찰이 출동한 상습범이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이 가정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국가가 탈출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은 대부분 주(州)에 '의무 체포제'가 있다. 경찰이 가정 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하면 즉시 피해자와 가해자를 따로 떼어놓고 최대 72시간 동안 분리 조사를 벌인다. 출동한 경찰은 피해자 말 이외에도 현장에서 자녀의 표정에 나타난 공포, 반려동물의 상태, 화분·집기 상태 등 수십 가지를 확인한다. 싱가포르도 가정 폭력 신고를 받으면 24시간 이내에 가해자를 경찰서에 불러 조사하고 피해자를 집 근처 상담소로 격리해 화상 통화로 판사에게 피해를 진술하게 한다. 변현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본부장은 "우리나라 가정폭력처벌법은 피해자 인권·목숨보다 가정 유지가 목적인 비상식적인 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