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반(反)트럼프 언론인이자 미국 NBC 유명 앵커인 메긴 켈리(47)가 ‘핼러윈 흑인 분장’ 발언으로 소속 방송사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놓였다. 지난해 1월 12년간 몸담았던 미 보수언론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자리를 내려놓고 진보 성향의 NBC로 자리를 옮긴 지 약 1년10개월 만이다.
지난 23일(현지 시각) 켈리가 내뱉은 말이 문제가 됐다. 자신이 진행하는 NBC 오전 9시 프로그램 ‘메긴 켈리 투데이쇼’에서 "백인이 핼러윈 흑인 분장(블랙 페이스·Blackface)을 하는 게 왜 인종차별적인 행동인지 모르겠다"는 취지로 말한 것. 그는 "요즘엔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거나 흑인이 백인 분장하면 곤란한 상황이 된다. 내가 어릴 적 특정 캐릭터를 따라 흑인 분장을 하는 것은 괜찮았다"고 했다.
방송이 나간 후 켈리를 향해 "흑인 비하",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의 동료들도 "미국에서 그간 흑인 분장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게 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켈리의 발언을 비판했다. 서구에서 흑인 분장은 금기시되는 행동이다. ‘블랙 페이스’라고 불리는 흑인 분장은 백인 배우가 흑인을 흉내내기 위해 얼굴을 검게 칠하고 입술을 두껍게 표현하는 것이다. 흑인 노예제가 있던 미국에서 조롱과 인종차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켈리는 24일 방송에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발언을 사과했지만 비판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그는 25일부터 투데이쇼 생방송에 나타나지 않았다. 방송은 사전 녹화분으로 대체됐다. 25일 CNN은 소식통을 인용, 켈리가 NBC 시사·뉴스 프로그램에서 퇴출당할 것이라고 전했다.
◇ 트럼프 ‘앙숙’으로 명성 얻은 폭스뉴스 앵커
1970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켈리는 변호사 출신으로, 폭스뉴스 인기 시사 프로그램인 ‘더 켈리 파일’을 맡았던 스타 앵커였다. 2014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선정된 이력이 있다.
켈리는 대표적인 트럼프 ‘앙숙’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폭스뉴스에 입사한 켈리는 2015년 8월 공화당 대선 경선 첫 TV 토론회에서 트럼프 대통령(당시 후보)을 몰아세우며 간판 앵커로 떠 올랐다. 토론회 진행자였던 켈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 비하 발언으로 그를 궁지에 몰았다.
화가 난 트럼프 대통령이 켈리를 향해 월경(月經)을 의미하는 말을 해 역풍을 맞은 건 유명한 일화다. 켈리가 월경을 해 신경이 예민해져서 자신을 쏘아붙였다는 것. 그는 토론회 이후 CNN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토론에서 켈리가 내게 괴상한 질문들을 했다. 그녀가 눈에서 피를 뿜는 걸 볼 수 있었을 거다. 다른 곳에서도 피가 나오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발언이 퍼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 내부에서부터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폭스뉴스 소유주이자, 공화당의 ‘킹 메이커’인 루퍼트 머독은 "트럼프는 공인의 생활을 배워야 한다"고 비난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다른 곳’이라는 표현은 ‘코’를 뜻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후 켈리는 2016년 11월 발간한 자서전에서 자신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서 벌어졌던 비공개 일화를 소개해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세틀 포 모어(Settle for More·더한 것에 만족하라)’에서 "내가 토론회에서 할 질문을 트럼프가 미리 알아내 폭스뉴스 임원에게 항의했다", "트럼프가 내게 뉴욕 트럼프타워나 플로리다 초호화리조트인 마라라고 숙박권을 제안하며 자신에 관한 보도 내용을 우호적으로 돌리려 했다"고 밝히는 등 트럼프 대통령을 계속 비판했다.
◇ 폭스뉴스→NBC로 이직 후 지지부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켈리는 지난해 1월 폭스뉴스를 떠나 NBC방송으로 자리를 옮겼다. 켈리는 NBC로부터 낮 시간대 뉴스와 일요일 저녁 뉴스 진행을 보장받고 NBC로 향했다.
그는 "매일 밤늦게 집에 가는 것보다 세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라고 이직 이유를 밝혔다. 폭스뉴스는 그를 붙잡기 위해 기존 연봉의 두 배인 2000만달러(약 241억원)를 제시했지만 그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가 황금시간대에 진행해온 ‘더 켈리 파일’은 폭스뉴스에서 두 번째로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켈리는 NBC에서 승승장구하지 못했다. CNN에 따르면 NBC는 3년간 연봉 2300만달러(약 262억원)라는 거액을 주고 스타 앵커인 켈리를 영입했지만 실적이 지지부진했다. 그는 ‘뉴스 매거진’이라는 일요일 저녁 프로그램과 문제가 된 평일 오전 프로그램 ‘메긴 켈리 투데이쇼’ 두개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뉴스 매거진 프로그램은 저조한 시청률로 폐지됐고 남은 투데이쇼마저 기대에 못 미쳤다.
이 때문에 핼러윈 흑인 분장 사건 이전부터 NBC 직원들은 켈리의 프로그램을 "대재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켈리와 NBC 경영진 간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누가 켈리의 후임이 돼 투데이쇼를 맡을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CNN은 소식통을 인용, 켈리가 자신의 에이전시였던 ‘CAA’와 결별했으며 변호사 브라이언 프리드먼을 고용했다고 보도했다. 프리드먼은 26일 NBC 경영진과 만나 켈리 퇴출 문제를 두고 담판을 지을 예정이다. 만약 NBC가 켈리에게 사직을 권고하면 켈리는 남은 계약기간 1년을 이유로 막대한 보상금을 요구할 수도 있다.
NBC 대변인은 이와 관련 논평을 거부한 상태다. 항간에는 켈리가 다시 폭스뉴스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이에 폭스뉴스는 25일 "우리는 현재 폭스뉴스 전체 앵커진에 매우 만족한다"고 짧은 성명을 냈다. 켈리를 다시 영입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 이전에도 ‘산타’로 인종 차별 논쟁 불러일으킨 켈리
켈리가 촉발한 인종 차별 논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3년에도 ‘산타 인종 논쟁’으로 곤욕을 치렀다. 뉴멕시코주(州)에 거주하는 흑인 고등학생이 산타클로스 복장을 했다가 선생님이 "흑인이 어떻게 산타 옷을 입을 수 있냐"고 고함을 친 일이 알려지면서 미국 사회는 ‘산타 피부색 논쟁’에 휩싸였다.
아이샤 해리스라는 한 블로거가 10일 미국의 진보 성향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Slate)에 ‘산타는 더 이상 백인이면 안 된다’는 제목의 칼럼을 싣자, 켈리가 "산타는 명백히 백인"이라고 못 박으면서 ‘흑백 갈등’이 본격화됐다. 해리스는 "흑인 산타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 같은 흑인이 어린 시절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 없도록 아예 펭귄 산타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흑과 백이 반반씩 섞여 있기 때문이다.
켈리는 당시 "해리스의 글 제목을 읽자마자 어찌나 황당했는지 웃음을 못 참겠더군요. 지금 TV 보는 어린이 여러분, 똑똑히 들으세요. 다른 거 볼 것도 없이 산타는 백인이에요. 백인 그 자체!"라며 ‘산타는 백인’이라고 못 박고 진행해 비난받았다. 상대를 비웃는 그의 진행 태도도 도마에 올랐다. CNN의 유명 앵커 앤더슨 쿠퍼도 켈리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폭스뉴스의 프로그램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해대는 건지, 그들 얘길 듣다 보면 내가 백인이라는 사실조차 헷갈린다"며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