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Habsburg).’

익숙하지 않지만 묘한 울림이 있는 명사다. 합스부르크는 빈과 오스트리아를 640년간 지배한 왕조이다. 그 이름으로 유럽의 절반을 다스렸고 그 문장(紋章)을 단 배들은 세계 곳곳을 탐험하고 개척했다. 그 깃발을 든 군대는 여러 대륙을 정복하고 문명을 파괴했다. 잘잘못을 떠나 그들은 인류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누구나 그러하듯 시작은 한미했다.

가문의 지위는 백작에 불과했고, 터전은 스위스 취리히 근처의 작은 성(城)이었다. 성의 이름은 '매의 성'을 뜻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독일 왕에 선출된 가주(家主) 루돌프(Rudolf·재위 1273~1291)가 대(代)가 끊긴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자신의 아들들에게 배정함으로써 중흥의 계기를 마련했다(1278년). 그 후 2세기 동안 유럽의 변방 빈에서 가문은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

1493년 오랜 기다림 끝에 가문을 일으켜 세울 사람이 나타났다.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Ⅰ·재위 1493~1519). 그는 허울뿐이던 황제의 나라 오스트리아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로 만들 터였다. 그런데 그의 주무대는 빈이 아니었다. 알프스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도시 인스브루르크였다.

제국의 수도가 된 산골 소도시

인스브루크는 험준한 티롤(Tirol) 땅 깊숙한 곳에 있다. 티롤을 따라 동서로 알프스산맥이 길게 뻗어 있고, 그 사이로 좁게 난 계곡 가운데를 인(Inn)강이 흐른다. 오스트리아 동쪽 어딘가에서 차를 타고 서쪽 인스브루크로 가다 보면 언제부턴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알프스산맥 사이를 지나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강을 따라 남부 독일 로젠하임에서 인스브루크에 이르는 계곡 사이의 길은 무려 110㎞에 이른다. 장관이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펼쳐진 인스브루크의 그림같은 풍광. 남독일과 북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던 탓에 예로부터 유럽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자들이 탐내던 도시였다. 오늘날에는 전세계 스키어들이 눈독 들이는 스키의 천국이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계곡 사이로 신기루처럼 도시가 나타난다. 인스브루크다. 인강은 정확하게 도시 중앙을 흐른다. 현재 이곳은 오스트리아에서 다섯째로 크다. 인구가 14만명도 되지 않지만 이 나라에서는 대도시다. 500년 전 이곳에서의 삶은 어땠을까? 막시밀리안은 지금도 외진 이곳, 인스브루크를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도나우 강변의 풍요로운 대지에 우뚝 선 대도시 빈 대신에. 왜 그랬을까?

알프스 남북을 잇는 요지

인스브루크는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독일을 잇는 교통의 요지다. 인강을 따라 오스트리아의 중심부로 나아가기도 편하다. 선조들은 유럽 문명의 동쪽 경계에 있는 오스트리아에 만족했는지 몰라도 막시밀리안은 달랐다. 그는 중원(中原)을 품고자 했다. 원대한 꿈은 결혼에서 시작됐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는 부르고뉴 공작이었다. 그의 영토는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에서 벨기에를 거쳐 네덜란드까지 뻗어 있었다. 중세부터 상공업과 교역이 가장 발달한, 부유한 지역이었다. 1477년 공작 샤를(Charles)이 갑작스럽게 전사(戰死)하면서 공국은 유일한 상속녀 마리(Mary of Burgundy·1457~1482)에게 돌아갔다. 아버지를 잃은 마리는 자신과 공국을 지켜줄 신랑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모든 왕실이 그녀를 탐했다. 국익을 위해서는 반드시 부르고뉴 공국을 손에 넣어야 했던 프랑스의 왕은 일곱 살밖에 안 된 왕세자-미래의 샤를 8세-를 신랑 후보로 내세워 마리를 압박했다. 마리는 '꼬마'와 결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마음에 품고 있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 생전에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열정적인 청년 막시밀리안이 행운의 남자였다. 막시밀리안은 요청을 받자마자 지체 없이 출발했다. 미친 듯이 대륙을 질주해 프랑스 군대보다 먼저 마리에게 닿았다. 둘은 플랑드르의 도시 헨트(Ghent)에서 결혼했다(1477년 8월 16일). 무기력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Ⅲ·재위 1440~1493)의 아들 막시밀리안은 이 결혼으로 유럽 중원에 자신의 깃발을 꽂았다. 이제 목표는 지켜내고 확장하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결혼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승자는 막시밀리안이었다. 1490년 그는 척박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티롤을 물려받았다. 이곳의 중심 도시 인스브루크는 부르고뉴 공국의 화려한 도시들이나 빈에 비해 초라하고 불편했다. 막시밀리안은 이곳을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 제국을 건설하고 경영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사후(死後) 오스트리아 전부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고귀한 자리를 물려받은 후에도 그의 수도는 변함없이 인스브루크였다. 이 도시를 축으로 막시밀리안 황제는 평생 대륙을 질주했다.

여기에서 황제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계 전략을 수립하고 진두지휘했다. 일련의 전략 속에서 아들과 딸을 스페인 제국의 왕자, 공주와 결혼시켰다. 손자·손녀를 헝가리·보헤미아 왕국의 후계자들과 결혼시킬 것을 약속했다. 행운의 여신이 막시밀리안의 노고에 선물을 보낸 것일까? 스페인 제국과 헝가리·보헤미아 왕국의 대가 끊기면서 모두가 막시밀리안의 후손들에게 돌아갔다.

나폴레옹에 맞선 산사나이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막시밀리안 시대가 합스부르크의 봄이었다면, 그의 아들 카를 5세와 그의 손자 펠리페 2세 시절은 여름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을을 지나 프랑스혁명 이후 겨울이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겨울은 깊어졌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러시아와 함께 싸웠지만 무의미했다. 나폴레옹은 티롤을 빼앗았다. 막시밀리안의 후손들을 대신해 남독일과 북이탈리아를 경영하는 건 이제 나폴레옹이었으니, 그 땅이 필요한 것도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충실한 동맹국 바이에른 왕국에 티롤을 넘겼다. 막시밀리안의 수도였던 인스브루크에 프랑스와 바이에른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러나 충성심 강한 티롤의 산사람들은 쉽게 외세의 지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1809년 4월). 평범한 소시민 안드레아스 호퍼(1767~1810)가 이끌었다. 프랑스·바이에른 군대를 상대로 거듭 승리를 거뒀고 인스브루크를 되찾았다.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프란츠 1세는 "티롤을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격려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합스부르크는 나폴레옹에게 바그람에서 다시 대패했다(1809년 7월).

인스브루크와 인연을 가진 세 남자. 막시밀리안 황제(왼쪽)는 이곳에서 제국을 건설했고, 호퍼(가운데)는 이 곳에서 나폴레옹과 싸웠으며, 슈쉬니크(오른쪽)는 히틀러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티롤을 다시 넘겨줬고, 의병(義兵)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나폴레옹 군대가 다시 인스브루크로 진주했고, 호퍼는 도망쳤다. 언제나처럼 배신자가 등장했다. 도주하던 호퍼는 사로잡혔다. 영웅에 대한 동정론이 거셌지만, 나폴레옹은 비정했다. 민중을 해방시킨다는 군대를 상대로 민중이 저항한 셈이니 얼마나 아팠을까! 호퍼는 처형됐고 순교자가 됐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호퍼는 영웅으로 귀환했다. 지금 그는 궁정교회 호프키르헤(Hofkirche) 안 막시밀리안 황제의 가묘(假墓) 옆에 묻혔다. 핏줄이나 유산이 아닌 자신의 행위와 용기로 호퍼는 죽어 황제와 동급에 오른 것이다.

"여러분, 이제 때가 됐습니다."

합스부르크의 겨울은 백 년 넘게 지속됐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왕조는 결국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멸망했다(1918년). 제국은 여러 개의 공화국으로 쪼개졌고, 티롤과 주도(州都) 인스브루크는 오스트리아공화국에 소속됐다. 민주주의의 뿌리가 약하고 정치적으로 분열된 신생 공화국은 추락한 위상과 경제적 고통을 견뎌내지 못했다. 히틀러를 칭송하고 따르는 자들이 늘었다. 나치 추종자들은 폭력을 행사했다. 1934년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권력자 돌푸스를 살해했다. 돌푸스의 뒤를 이은 슈쉬니크는 조국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지만 히틀러 눈에는 가소로웠다.

1938년 2월 사실상 주권을 내놓으라는 히틀러의 최후통첩을 받아든 슈쉬니크는 고향 인스브루크로 향했다. 그 도시에서 막시밀리안은 제국을 건설했고, 호퍼는 제국을 지켰다. 이제 자신이 오스트리아를 구할 차례라 느꼈을 것이다. 슈쉬니크는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연설의 끝은 호퍼가 나폴레옹에 맞서 티롤의 주민들을 독려할 때 사용했던 짧은 문장으로 장식됐다.

"여러분, 이제 때가 됐습니다." 그러나 슈쉬니크가 기대한 '봉기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목격한 것은 자신을 향한 칭송과 환호성이었다. 막시밀리안의 원대한 이상도, 호퍼의 강인한 용기도 더 이상 이 땅에는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 사시사철 관광객과 스키어들로 붐비는 인스브루크는 80년 전의 비통함도 잊은 듯하다. 세월이 좋으니 뭐라 할 일도 아니다. 산골에서 유럽을 품고자 했던 황제의 웅혼한 기상을 그가 남긴 황금 지붕(Golden Roof)과 왕궁(Hofburg), 궁정교회(Hofkirche)를 통해 희미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한민국 서울의 공통점? 건축가 하디드 작품 있어

인스브루크와 서울은 공통점이 전무(全無)해 보이지만 아주 우연한 지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1950~ 2016)다. 이라크계 영국인 하디드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賞)을 받은 첫 번째 여성이다.

인스브루크는 세계적인 동계 스포츠의 성지(聖地)다. 1964년(9회)과 1976년(12회)의 동계올림픽이 이곳에서 개최됐다. 그리고 이곳의 스키점프대를 하디드가 설계했다(2003년 완공). 오스트리아의 영웅 안드레아스 호퍼(Hofer)가 나폴레옹 군대를 상대로 승리로 거둔 베르크이젤(Bergisel)에 있는 스키점프대는 오늘날 인스브루크의 상징이다.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의 작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인데 오늘날 서울을 대표하는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하디드가 설계한 인스브루크 스키 점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