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를 내든가 상점을 비워주든가 해야지…."(원고)

"아니, 10년 넘게 임대료 안 받다가 갑자기 내라는 게 어딨어요."(피고)

2일 전남 여수시법원 1호 법정에선 원고 백모 할아버지와 피고 이모 할머니 사이에 상점 임대료 720만원을 둘러싼 설전(舌戰)이 벌어졌다. 법대(法臺)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박보영(57) 전 대법관은 오른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제 질문에 대답 안 하시고 자기 할 말만 하시면 재판 바로 끝낼 겁니다! 제가 묻는 데 대답하셔야 접점을 찾을 수 있어요."

박 전 대법관의 불호령에 두 사람은 다툼을 멈췄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박 전 대법관은 합의점을 찾아 화해권고 결정을 내리기로 하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화해권고는 판결에 이르기 전 판사가 직권으로 당사자에게 합의를 권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소송이 끝난다.

전남 순천 출신인 박 전 대법관은 고향과 가까운 여수시법원 판사가 된 뒤 이날 첫 민사 재판을 열었다. 그는 지난달 전직 대법관으로는 처음으로 시·군법원 판사가 됐다. 시·군법원 판사는 소송액 3000만원 이하인 서민 사건 1심을 맡는다. 그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총 73건의 소액 재판을 진행했다.

이날 재판의 대부분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당사자가 직접 재판에 나와 변론하는 '나 홀로 소송'이었다. 40석 규모의 방청석은 절반 정도밖에 차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자주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고, 방청석에 앉아 화장하는 중년 여성도 있었다. 당사자들은 툭하면 말싸움을 벌였고, 박 전 대법관에게 "답변서는 어떻게 써야 하나요?"라고 묻는 이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박 전 대법관은 당사자들의 말을 경청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법정에 나온 두 명의 중년 여성은 계약금 200만원 반환 문제로 민사소송을 하다 몸싸움까지 벌여 감정이 상한 상태였다. 180만원에 화해를 권고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않자 박 전 대법관은 두 사람을 각자 다른 방에 불러 개별 면담을 했다. 면담이 끝난 뒤 그는 "두 분 사건은 제가 처음 (여기) 와서 읽어보고 반드시 원만하게 끝내고 싶다고 생각한 사건이다. 소송이 길어질수록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여러분 앞길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A4 용지를 건네 각자 최대한 양보할 수 있는 금액을 적어보라고 한 뒤 화해권고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는 "제가 생각하는 가장 적정한 해결 방법을 서면으로 보내드리겠다"고 한 뒤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방청석엔 그의 재판을 보려고 KTX 첫차를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경기 성남시에 사는 이명화(65)씨는 "판사님이 당사자들의 말을 다 들어주고 소통하려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며 "서민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소액 재판을 전담하는 원로 법관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 전 대법관은 재판이 끝난 뒤 기자와 만나 "아무리 액수가 적어도 당사자 본인에게는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소홀히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10일 여수시법원에 처음 출근하던 날 민노총 조합원 등 30여 명이 시위를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이들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그가 대법관 시절 재판한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이 '재판 거래' 대상이었다고 주장했다. 법원 관계자는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날 법원 앞은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