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철 여행 작가

여행 작가에겐 꼭 체험해봐야 하는 '필수 과목'이 있다. 그중 하나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 글렌코 산맥에 오르는 것이다. 정상을 밟고 바라보는 광활한 자연경관은 가히 천국에 비할 만하다고 한다. 세계 여행을 시작했을 때 이 코스에 도전했다. 마음도 등산화도 단단히 조여 매고 글렌코 산맥 트레킹 코스 입구에 섰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이름하여 '스리(three) 시스터스'. 동네 노는 언니들 서클 이름 같은 세 봉우리는 초보 여행자를 우습다는 듯 깔아 보고 있었다. 주눅이 들었지만 저 건방진 언니들과 싸워 이기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그 오기는 싸움 한번 해본 적 없는 순진한 모범생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올라도 제자리였다. 천국에 비할 풍경이고 나발이고 힘이 들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가 왜 여행을 시작했는지 떠올랐다. 허락되지 않는 것을 오기로 부둥켜안고 걷는 인생길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나의 욕심은 습관처럼 내 몸에 배어 먼 이국 땅에서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려놓자.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가자'고 생각을 바꿨다. 봉우리 진격을 멈추고 에라 모르겠다 바위에 걸터앉았다. 하늘엔 난생처음 보는 예쁜 새들이 지지배배 노래하고, 다람쥐 같은 작은 생명체들이 주위를 오갔다. 그루터기에 자리 잡은 풀잎의 촉촉함과 나무 사이를 지나쳐 뺨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느껴졌다. 글렌코 산맥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것들이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는 돌덩이 위가 나에겐 스코틀랜드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간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아닐 텐데, 뒤처질세라 앞을 향해 열심히 걷고 또 걷는다.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가 보면 어떨까. 잠시 발길을 멈추면 여유가 생기고,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만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