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선임기자

청와대 참모들이 모든 정책을 휘두르고 정부 부처는 따라갈 뿐인데, 굳이 백운규 산자부 장관을 소재로 삼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럼에도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얼마 전 그는 기자 간담회를 갖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스개로 에너지 전환 쪽은 불이 꺼졌나 했는데, 많이 발목이 잡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요즘 산자부에선 계속 이런 농담 한다. '기승전 탈원전' '모든 게 탈원전'이라고."

탈원전 정책으로 국가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주무 장관은 이를 농담이나 우스개로 삼았다. 탈원전을 문제 삼아 잘해보려는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어설프게 그의 발목이나 잡아온 부류가 된 셈이다.

장관도 '입'이 있으니, 언론이나 야당의 비판을 그냥 듣고만 있을 이유가 없다. 반박하고 논쟁할 수 있다. 성패는 그 논리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느냐에 달렸다. 이공계 교수 출신이라 객관적 사실관계를 잘 가릴 것 같은 그가 이렇게 말했다. "여름철 전력 수급에 탈원전이 영향 미친 거 없다는 거 다 아시고, 전기 요금에 영향 미친다는 거 전혀 사실무근이고, 계속 설명을 드리는데 고장 난 녹음기 같은 생각이 든다."

전력 수급과 전기 요금에 탈원전이 영향 미친 거 없다는 것을 누가 다 알고 있다는 건가. 장관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고 물어보라. 대부분은 탈원전이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 것이다.

이번 여름 어느 시점에 국내 원전 24기 중 11기가 가동이 멈춰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이 드러나자 정부는 "과거에 부실 시공을 했기 때문에 정비하느라 그랬다"고 설명했다. 예방 정비는 돌아가면서 통상 한 달 안에 이뤄져왔다. 이번처럼 몇 달씩 길어지고 한꺼번에 한 적은 없었다. "탈원전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원전 직원들은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원전의 발전 총량은 재작년 상반기와 비교해 7할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력 수요를 맞추려면 화력과 LNG 등 다른 발전소를 더 많이 돌려야 했다. LNG 발전의 연료 단가는 원전의 두 배 이상이다. 화력발전에 들어가는 기름과 유연탄의 국제 가격도 상승했다. 한전이 전력 수급에 애를 먹고 크게 적자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한전은 최근 3분기 연속 영업적자를 냈고, 시가총액은 현 정부 출범 시점과 비교해 8조원가량 증발했다. 주주들은 난리가 났다. 초우량 기업인 한전이 이런 적자 늪에 빠진 일은 처음이다. 눈앞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탈원전과 무관하다"며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주무 장관도 여간 강심장이 아니다.

그는 국회 상임위에서 "녹음기가 고장 났으면 고쳐서 틀어야지"라는 야당 의원의 말에 "고장 난 녹음기를 고쳐도 저는 진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맞받았다. 그는 이렇게 비장하게 수사(修辭)해도 되는 걸까. 그의 진실이란 보여도 보지 않으려 하고 들려도 안 들으려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면서 그가 "끊임없이 말씀드리지만 이번 정부에서 2023년까지 원전 5기 계속 짓기로 했다. 어떻게 이 정부에서 탈원전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식의 주장을 폈다. 탈원전 때문에 공격받는 순간을 모면하려고 한 발언일 수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탈원전 공약'은 철회된 적이 없다.

그는 뭔가 착각하는 것 같다. 그가 말한 원전 5기는 과거 정부에서 착공돼 건설 중인 원전이다. 그중 신고리 5·6기는 문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건설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당시 대통령은 '한번 맛보기'로 해봤을지 모르나 그때부터 원자력 산업계는 크게 흔들렸다. 관련 업체들은 앉아서 엄청난 손실을 봤고, 한 전기 설비 회사에서는 공사가 중단된 몇 개월 동안 기술자들의 9할이 중국에 스카우트돼 떠났다. 원자력학과에는 학생 지원이 끊기고 부품 업체마다 하늘이 노래진 기분을 맛보고 있다.

이게 세상 현실인데, 현 정부가 무슨 탈원전을 하고 있느냐고 말하면 국민을 상대로 속임수를 쓰는 것밖에 안 된다. 무엇보다 그는 2023년 이후의 상황은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기간부터 기존 원전 10기의 설계 수명이 끝난다. 7000억원 이상 들여 보수한 월성 1호기까지 조기 폐쇄한 전력을 보면, 정권이 재창출될 경우 설계 수명을 맞은 10기의 연장 운행은 어렵다. 당초 그 시점에 맞춰 신규 원전 6기를 계획해놓았지만, 현 정권이 이미 백지화했다.

장관은 간담회 말미에 “갈 길이 바쁜데, 산업 혁신해 경쟁력 높이고 신산업 개발해 양질의 일자리 팍팍 속도감 있게 가고…”라고 했다고 한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정책이 앞길을 막는데 그걸 안 치우고 대체 어디로 팍팍 가려고 갈 길이 바쁜가. 현 정권에서는 말(言)로만 다 하는 것도 전염이 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