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가 그린 그림에 가필(加筆)해 자기 이름으로 판매한 혐의(사기)로 재판에 넘겨진 가수 조영남(73·사진)씨가 17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죄를 선고한 1심을 뒤집은 판결이다. 미술 작품의 가치는 누가 물감을 칠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가 중요하다는 취지다. 미술계의 반응은 엇갈렸다.

조씨는 2011년 9월부터 2016년 4월까지 송모(63)씨 등 화가 2명을 고용해 '화투 그림' 26점을 그리고, 자기 작품이라고 속인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송씨 등이 90%를 그리면 조씨가 가벼운 덧칠만 했다는 게 검찰 조사 결과다. 검찰은 이런 그림에 조씨가 서명을 한 후 '조영남 작품'으로 전시회에 내건 것은 구매자를 속인 사기라는 입장이다.

조씨는 재판에서 "송씨 등은 그림 작업을 돕는 조수에 불과하고, 아이디어는 내가 냈으니 내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도 조수를 썼고, 조수를 쓰는 것은 현대미술의 흐름이자 관행"이라고도 했다.

1심은 검찰 주장을 받아들여 조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작품의 아이디어나 소재의 독창성 못지않게 아이디어를 외부로 표출하는 창작 표현 작업도 회화의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또 "송씨는 조수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작품 창작에 참여한 작가이기 때문에 해당 작품을 온전히 조씨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2심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부(재판장 이수영)는 "해당 작품은 조씨 작품이 맞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현대미술에서 작가의 영역은 오로지 아이디어의 창출에 있다는 견해를 가진 작가들이 있고, 다수의 조수 또는 전문 인력을 고용해 미술품을 대량 생산하는 방식이 점점 널리 퍼지는 추세"라고 했다. 이어 "이 미술 작품은 화투를 꽃으로 표현하는 조씨의 아이디어가 핵심"이라며 "송씨 등은 보수를 받고 조씨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는 기술적 보조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조씨가 구매자들에게 조수를 썼는지 사전에 알릴 필요도 없다고 봤다. "구매자들은 '아이디어가 참신하다'거나 조씨 팬이라는 이유로 작품을 샀고, 미술 작품을 구매하는 동기는 다양하기 때문에 작가의 친작(親作) 여부가 작품 구매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날 판결을 놓고 미술계 반응은 엇갈렸다.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미술계 입장에서 보면 문제 소지가 많은 판결"이라며 "조씨는 개념 미술가가 아니고 자신이 그렇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다. 아이디어를 내고 자신이 직접 그린 것처럼 이야기했다"고 했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도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제 작업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게 동시대 미술의 한 축이긴 하지만 이를 보편적인 상황이나 관행으로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다"고 했다 반면 이영주 페이스 갤러리 서울 대표는 "현대 작가들은 대부분 '개념'을 작품의 중심으로 본다"며 "조수가 조씨 작품에 창의적으로 기여했다는 게 밝혀지지 않은 이상 이번 판결은 정당하다"고 했다. 조씨는 선고 직후 "재판부가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셨다.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