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산울림 모습. 왼쪽부터 김창훈·창익·창완

문은 세계의 경계다. 문을 열어야만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있다. 삶은 새롭고 낯선 저기를 끊임없이 꿈꾼다. 저잣거리 범부(凡夫)부터 근엄한 구도자까지 자기 앞에 문 하나씩이 있다. 생활의 문이든, 욕망의 문이든, 깨달음의 문이든 열어야 할 절박함은 똑같다. 문은 열리기 전엔 벽이다. 그러므로 모든 삶은 면벽 중이다.

뜨거움만이 삶의 전부인 시절이 있다. 이름하여 청춘이다. 그 청춘이 강고한 문에 막혔다. 안간힘을 써보지만 요지부동이다.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그 막막한 절망을 이기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데시벨로 외친다. "문 좀 열어줘." 산울림이 부른 이 노래는 록을 앞장세운 사랑의 고성방가다.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짧고 격렬한 샤우팅의 연속이다. 가사는 5음절에 불과한 단문 7개가 전부다. 이 일곱 문장에 모든 것을 걸고, 청춘은 간절한 삶의 한순간과 대치한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곡을 만든 밴드 리더 김창완이 세상의 멱살을 쥐고 흔들 듯 고함친다. "내가 있잖아/ 여기 있잖아." 가요에서 이렇게 도발적이며 충격적인 서두가 있었던가. 이 배짱, 이 호기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서 있다는 게, 사랑을 해야 할 이유의 전부다. 노래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려간다. "문 좀 열어줘/ 방긋 웃어줘." 우회로도, 거추장스러운 어떤 수사도 없다. 오로지 열렬함 하나만으로 삶의, 사랑의 공고한 방벽을 일점 돌파하려 한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밤이 새겠네/ 못 보고 가네"라며 끝내 문 앞에서 돌아서야 할 때, 삶은 결국 패배에 익숙해져야 할 외로운 여정임을 깨닫게 된다. 결연한 듯 쓸쓸한 듯 터져 나오는 마지막 가사 "여기 있잖아"에는, 예감하던 좌절을 확인한 자의 슬픔이 배어 있다.

대답 없는 사랑의 언어일수록 뜨거운 법이다. 가로막은 문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치고 그 메아리만 허망하게 듣는 밤과 새벽을, 청춘이니까 감당하는 것이다. 그 파닥거리던 언어들이 식어 무심한 시간 속으로 퇴색해갈 즈음, 삶은 한때 제 안에 있었던 뜨거움마저 잊어버리고 그저 그렇고 그런 날들의 쳇바퀴 속으로 저물어갈 것이다.

산울림이 데뷔 앨범에서 저 대찬 샤우팅으로 세상을 쩌렁하게 울린 게 벌써 41년 전이다. 그들의 첫 앨범은 모든 트랙이 문제적이지만, 이 곡의 한 방은 아주 묵직하다. 매혹적인 문의 메타포를 앞세운 이 도도한 청년성은 한국 록의 중요한 유산이다.

가사는 극히 짧지만 노래는 6분에 이르는 방송 부적합 대곡이다. 짧은 가사 사이에 기타와 키보드의 긴 솔로 연주가 이어진다. 화덕에서 막 끄집어낸 듯한, 저 샤우팅의 뜨거움을 식히기 위해선 휴지기가 필요했으리라. 리듬을 풀었다 다잡았다 하며 3분 30초 연주를 유유히 끝내고 다시 마지막으로 달려간다. 패배를 각오한 열렬한 사랑의 주문처럼, 일곱 문장이 한 번 더 반복되고 노래는 끝난다. 그 어떤 예측도 무효로 만드는 이 자유분방한 송라이팅은 오로지 산울림만의 것이다. 산울림의 음악은 놀라운 예술적 기동력으로 한 시대 청춘의 정서적 외연을 넓혔다. 그들은 앞서간 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 청춘의 열정과 패기는 저 먼 41년 전으로부터 후퇴해온 것이 틀림없다. 간절하게 면벽 중인 모든 삶을 대신해, 8월의 땡볕보다 더 쨍쨍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문 좀 열어줘." 오늘 밤 한 소식을 얻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