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1심 무죄까지 163일
구속영장 기각되며 반전…치열한 다툼
163일 만에 무죄 판결

안희정(53)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의혹은 지난 3월 5일 세상에 알려졌다. 정무비서였던 김지은(33)씨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안 지사로부터 수 차례 성폭행 당했다”고 폭로한 것. 사회 전반적으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운동이 들불처럼 확산하던 시점이었다. 김씨의 폭로는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방송 직후 안 전 지사 측은 “부적절했지만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3월 6일 또 다른 피해여성이 등장했다. 안 전 지사는 폭로 하루 만에 “모든 게 제 잘못이다. 도지사직을 내려놓고 정치활동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3월 5일 김지은 씨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폭행 피해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미래권력 안 전 지사는 ‘상습 성범죄 피의자’로 추락했다. 163일이 되던 이날 서울서부지법은 안 전 지사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하룻밤 사이 '대권주자'에서 '성범죄 피의자'로
김씨 폭로 이후 여론은 '차기 대권주자' 안 전 지사에 등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안 전 지사는 3월 8일로 예정된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잠적했다.

그는 폭로 나흘 만인 3월 9일 처음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소장이 접수된 서울 서부지검에 '기습 출석'한 것이다. 검찰이 피의자 소환통보를 하지도 않았는데, 안 전 지사는 자진해서 출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소환을 기다렸습니다만 저도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3월 14일, 또 다른 피해자인 싱크탱크 ‘더민주주의 연구소’ 직원 A씨가 성폭행 혐의로 안 전 지사를 검찰에 추가 고소했다. 안 전 지사는 ‘상습 성범죄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됐다.

안 전 지사는 경기 양평군 컨테이너에 칩거했다. 그는 화장실이 딸린 20m²(약 6평) 남짓한 이 곳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성폭행 피의자로 검찰에 출두할 때만 ‘은거지’를 나왔다.

그러나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잇따라 기각되면서 반전(反轉)이 생겼다. 4월 5일 두 번째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영장전담판사는 "범죄 혐의에 대해 다퉈 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사건은 '진실공방' 양상으로 번졌다.

검찰은 결국 안 전 지사를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그는 수행비서였던 김씨를 상대로 지난해 7월 29일부터 올해 2월 25일까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강제추행 5회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안 전 지사에게 폭력·협박을 전제로 하는 형법 297조 ‘강간죄’가 아닌, 형법 303조 ‘업무상 위력(威力·상대를 제압하는 힘)에 의한 간음죄’를 적용했다. 안 전 지사가 성관계 과정에서 폭행·협박을 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안희정은 권위적 사람인가?" 치열한 법정공방
법정에서 양 측은 도지사의 지위를 이용해 성관계를 했는지를 놓고 주로 다퉜다.

6월 1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안 전 지사의 첫 재판이 열렸다. 검찰은 "이번 사건은 차기 대권 주자라는 막강한 권력과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이용한 전형적 권력형 성범죄"라며 "안 전 지사가 덫을 놓은 사냥꾼처럼 (김씨를) 유인했다"고 밝혔다. 안 전 지사 변호인은 "서로 애정을 가지고 (성 관계가)이뤄진 것으로 강압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7월 6일 두 번째 재판에서 안 전 지사, 김씨는 나란히 같은 법정에 출석했다. 그러나 상대를 볼 수는 없었다. ‘2차 피해’ 우려로 증인으로 출석한 김씨 앞에 차단막이 설치됐기 때문이다.

상하 지위 관계를 이용한 성관계였느냐가 핵심쟁점이었다. 증인들은 “안희정은 권위적인 사람인가”하는 문제로 법정에서 각기 다른 진술을 쏟아냈다.

안 전 지사 측이 신청한 증인들은 "안 전 지사는 (비서실장과) 맞담배를 필 정도로 권위적이지 않다" "밤 11시 이후에는 (안 전 지사) 전화가 오더라도 받지 않았다. 그래야 상대방이 전화를 안 할 것 아니냐"라고 증언했다.

“안 전 지사가 수행비서였던 김씨와 스스럼이 없이 지냈다”는 진술도 있다. 김씨에 이은 후임 비서였던 어모(35)씨의 법정 증언이다. “올해 충남 홍성의 한 고깃집에서 안 전 지사가 김씨와 이야기하다 뭔가 놀리는 말을 했는데, 김씨가 ‘지사님이 뭘 알아요’라고 대거리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비서들도 놀란 표정으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김씨 측이 신청한 주변인들은 상반된 증언을 했다. 김지은씨의 동료는 “김씨가 수행비서 업무에 대해 ‘그림자 같다’ ‘(안희정)감정의 배설창구 같다’는 표현을 썼다”고 증언했다. 안 전 지사에 대해 “조직 내에선 왕(王)같은 존재였다”, “안 전 지사가 나타나면 모두가 긴장했고 제왕적 분위기가 있었다”는 진술도 나왔다.

7월 13일 재판에선 안 전 지사의 아내 민주원씨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민씨는 작년 8월 충남 보령시 죽도에 있는 콘도 '상화원'에서 있었던 일화를 얘기했다. 민씨는 "당시 새벽 4시 김씨가 부부 침실로 들어와 3~4분가량 머물렀다"며 "남편을 좋아한다는 건 이전부터 알았지만 그날 위험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씨의 증언은 안 전 지사로부터 '위력(威力)에 의한 간음'을 당했다는 김씨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7월 27일 결심공판에 선 김씨는 "피고인(안희정)은 차기 대권주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노동과 성(性)을 착취하고 내 영혼까지 파괴했다"면서 "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너무나 잘 알고, 이를 이용한 이중인격"라고 진술했다. 안 전 지사는 최후변론에서 "사회적·도덕적 책임은 피하지 않겠지만 지위고하를 떠나 (성관계 과정에서) 위력을 행사한 적 없다"고 밝혔다.

8월 14일 재판부는 "합의된 성 관계"라는 안 전 지사 측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해자 의사에 반해 성적자유가 침해되기에 이르는 증명이 부족하다"며 "고 판단했다. 김지은씨가 '자기 결정'에 의해 안 전 지사와 성관계를 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1심 선고 결과를 받아 든 양측 반응은 극명히 갈렸다. 안 지사는 재판장을 나서며 "부끄럽다. 다시 태어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재판 직후 입장문을 내고 "부당한 결과에 주저앉지 않고 굳건히 살아 권력형 성폭행이 심판 받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며 항소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