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 오페라 본고장 유럽에서 한국인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주역으로 선 테너 이용훈, 취리히 오페라극장에 데뷔한 지휘자 김은선, 두 사람의 공연을 보고, 만났다.
◇메이저 오페라 극장 휩쓰는 테너 이용훈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파리 센강의 부두 노동자 루이지 역 테너 이용훈(45·서울대 교수)의 격정적 아리아에 상대 조르제타 역 소프라노 에바-마리아 웨스트브록은 "나 역시 고통스럽다"며 호흡을 맞췄다. 루이지는 조르제타와의 사랑을 눈치챈 남편 미켈레(볼프강 코흐)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둔다.
지난달 16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 오른 푸치니 오페라 '일 트리티코'. 이용훈은 푸치니의 단막 오페라 3편을 묶은 이 작품 중 첫 편인 '외투' 주역을 맡았다. 당당한 체구에 풍부한 성량을 마음껏 쏟아낸 그에게 수준 높기로 이름난 뮌헨 관객들은 발까지 굴러가며 박수를 몰아줬다. 공연 후 무대 뒤에서 만난 이용훈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스타였다. 지나치는 이마다 "최고"라며 인사를 건넸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는 매년 6월 말 시즌 화제작을 모아 한 달 넘게 오페라 페스티벌을 연다. '일 트리티코'는 내년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는 키릴 페트렌코 바이에른 오페라 음악감독이 지휘를 맡은 신작(新作)이다. 이용훈은 "메이저 오페라극장이 작심하고 연출과 무대 등을 새로 만들어 올리는 신작엔 거의 아시아 성악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는데 어쩌다 보니 신작 무대에 많이 선다"고 했다. 이용훈은 6월 취리히 오페라극장에서도 베르디 '운명의 힘' 신작에 나섰다.
서울대를 나와 뉴욕 매네스 음대에서 유학한 이용훈은 세계 주요 오페라극장이 앞다퉈 모셔가는 성악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런던 로열 오페라, 빈 국립오페라, 밀라노 라 스칼라, 뮌헨 바이에른 오페라 같은 정상급 무대에 정기적으로 선다. 역대 한국 테너 중 이용훈만 한 경력을 쌓은 이는 없다. 축구로 치면 영국 프리미어 리그 최강팀의 스타 플레이어다. 하지만 국내 무대에선 보기 어렵다. 2016년 말 롯데콘서트홀 송년음악회에 잠깐 선 게 전부다. "공연 스케줄이 4~5년 뒤까지 가득 차 있다. 나라고 왜 고국 무대에 서고 싶지 않겠나." 이용훈은 공연 다음 날 시드니 오페라 '아이다' 주역 라다메스를 부르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오페라극장의 마에스트라 김은선
김은선(38)은 7월 비제 오페라 '카르멘'으로 취리히 오페라극장에 데뷔했다. 다섯 차례 공연 중 마지막 공연이던 7월 14일 지휘대에 오른 김은선은 생머리를 뒤로 묶은 단정한 차림이었다. 김은선이 지휘한 이 극장 필하모니아 취리히 오케스트라는 경쾌하면서도 열정적인 '카르멘'을 고급 스포츠카처럼 날렵하게 연주했다. 1100석짜리 아담한 극장은 김은선의 지휘봉에 따라 병영(兵營)에서 카페로, 산속 요새에서 투우장으로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오페라를 지휘할 때마다 200명 넘는 단원과 합창단, 스태프와 만납니다. 저같이 낯선 지휘자를 만나면 신기해하죠. 이번에도 첫 리허설 때 '열여섯? 열일곱 살?' 하며 가볍게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한번 연습을 마치면 깍듯이 '마에스트라'(여성 지휘자의 경칭)라고 부릅니다. 프로정신이 철저한 사람들이죠."
연세대를 나온 김은선은 2008년 스페인 지휘자 헤수스 로페즈 코보스가 주최하는 오페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서른 줄에 베를린 국립오페라와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등 독일을 대표하는 극장에 두루 선 한국 지휘자는 그밖에 없다. 서른 다섯에 파리 바스티유 극장 음악감독으로 지명된 정명훈에 버금가는 경력이다.
다음 달엔 덴마크 코펜하겐의 로열 대니시 오페라극장 신작 '일 트로바토레', 10월 베를린 국립오페라의 '일 트로바토레', 12월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헨젤과 그레텔'에 이어 내년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루살카' 지휘를 맡는다. "내년 시즌부터 휴스턴 오페라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게 됐어요. 미국 연주 비중을 늘릴 계획입니다. 힘들지 않냐고요? 아직 서야 할 무대가 많잖아요." 여성 지휘자에게 문턱이 높은 오페라계(界)에서 김은선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한국 음악계의 역사로 기록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