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 응급실 배치 논란
"경찰이 경비원인가" VS "응급실은 특수한 곳"
“응급실에 경찰관을 배치해야 한다”는 의료계 요구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선 경찰들은 “경찰이 병원 경비원인가. 은행처럼 청원경찰을 두라”며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급실 경찰 배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 1일 벌어진 ‘전북 익산 응급실 의사 폭행 사건’ 때문이다. 당시 익산시 한 병원 응급실에서 술에 취한 환자가 의사를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공분을 일으킨 것이다. CCTV를 보면 이 환자는 “날 비웃는 거냐”면서 의사의 머리채를 틀어쥐거나,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쓰러진 의사에게 재차 발길질도 했다. 김한준 응급의학회 공보이사(서울성모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밤에는 응급실에 술에 취한 환자가 상대적으로 많다”며 “자신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등의 사소한 이유로 의료진 때리기도 한다"고 했다.
대한응급의학회·병원응급간호사회·대한응급구조사협회는 “응급의료현장에 경찰을 배치, 의사가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대국민호소문을 내놨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의료인이 무참히 폭행당했을 경우 합당한 수사 매뉴얼이 제정되도록 경찰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응급실에 앉아있으면 다른 112 신고 어떡하느냐"
경찰청 측은 "순찰 범위에 응급실을 포함하고, 응급실 신고를 제일 우선하겠다"며 의료계 요구를 수용하는 듯한 입장을 내놨다. 이에 일선 경찰들은 '뜨악'한 반응이다. 현장 인력도 부족한데 응급실 배치가 웬 말이냐는 것이다.
“응급실 폭행, 심각한 문제죠. 하지만 일선 경찰 지구대·파출소 인력이 정말 빡빡합니다. 여름휴가 쓰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병원에 경찰관을 배치한다니요. 다른 112신고가 들어왔을 땐 어떡합니까. 응급실만큼 경찰 출동을 기다리는 현장이 많습니다.” 경기도 한 경찰 지구대에서 근무하는 허모(26)씨 얘기다.
지난 3월 기준으로 전국 경찰관은 11만 6584명(의경·일반직 제외) 규모다. 이 중 지구대·파출소 근무자는 4만 7885명(전체 41%). 하루 근무자 기준으로는 1만5000여 명 경찰관이 치안 현장 일선에 서 있는 셈이다. 이런 형편이라 현장 근무자들은 지속적으로 “경찰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왔다.
인천광역시 한 경찰간부는 “‘병원을 특별순찰구역에 포함하겠다’는 경찰청 반응은 즉흥적인 것 같다”며 “앞으로 소방대원 폭행, 교직원 폭행이 여론의 주목을 받는다면 또 거기에도 경찰관을 배치하자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경찰이 병원 경비원인가” VS “응급실은 생명이 오가는 특수한 곳”
형평성 문제도 있다. 현재 한국은행·한강공원 등은 자체적으로 청원경찰을 두고 있는데, 공권력이 특정 조직(병원 응급실)만 상시 보호해서는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청원경찰이란 국가기관·사업장 경영자가 경찰관 배치를 청원해 배치되는 경찰로, 청원주가 봉급·피복비·교육비·퇴직금 등 일체의 비용을 부담한다. 병원에 청원경찰이 아니라 경찰관을 배치한다면 별다른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울산에서 근무하는 경찰관 정모(38)씨는 “병원은 ‘수익자부담원칙’에 따라 사설 경비원을 두고, 필요할 경우에 112신고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주장했다.
‘구급대원 폭행 사건’ 이후 소방재난본부가 자체적으로 119 광역수사대를 신설한 것과도 대조적이다. 119 광역수사대는 구급대원 폭행·소방차량 출동 방해 등 소방활동을 방해하는 사람을 전담 수사한다. 예산은 소방재난본부가 부담한다.
현직 경찰관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좀 더 격앙된 반응이 나온다. “경찰관도 많이 다치는데, 반대로 의사가 항시 (경찰서에) 대기해서 치료해 주느냐”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경찰관을 병원 경비원으로 부려 먹으려는 심보” “다른 112신고가 들어오면, 의사들이 경찰 대신 치안현장에 가주는가” 등이다.
반면 의료계는 반박한다. 의협 관계자는 “응급실은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특수한 곳”이라며 “위급한 환자들이 줄줄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응급실 의사가 폭행에 노출되면 정말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병원이 비용 아끼려고 경찰관 상시 배치를 요구한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자기 가족이 응급실에 실려 가게 됐는데, 의사가 폭행당해서 치료 못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응급실은 위급한 환자가 있는 곳이라 경찰이 지켜줘야 합니다. 언론에 알려진 의료진 폭행은 극히 일부입니다. 응급실 난동으로 숨진 의사도 실제 있습니다.” 의사 임모(34)씨 얘기다.
실제 대다수 ‘1차 의료기관’에서는 의사·간호사 1~2명만 근무하는 상황이다. 응급실 난동으로 인해 의료진이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응급실 난동범 솜방망이 처벌이 진짜 문제
응급실 난동범을 엄벌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솜방망이 처벌이 남아있는 한, 응급실 주폭(酒暴)들이 활개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공분을 산 '익산 응급실 폭행' 피의자는 경찰관이 출동한 이후에도 "죽여버리겠다"면서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현행법은 의료인을 폭행하는 행위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중형이 내려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의협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8년 5월까지 의료인 폭행과 관련된 사건은 대부분 벌금형에 그쳤다. 2014년 12월 술에 취해 대학병원에서 의사 어깨를 짓누르고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등 폭행한 난동범에게는 벌금형(100만원)만 선고됐다.
대구지역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박모(41)씨는 “경찰이 응급실 난동범을 잡아도, 법원에서 다 풀어주면 또 비슷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느냐”며 “중요한 것은 응급실에 경찰관을 배치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응급실 범죄는 꿈도 못 꾸게 엄벌해야 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