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89년만에 좌파정권이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는 1일(현지 시각) 멕시코 전역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출구조사 결과 중도좌파 모레나(MORENA·국가재건운동)당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64)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됐다고 전했다. 멕시코 여론조사 기관인 파라메트리아는 오브라도르가 53~5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예상했다.

출구 조사 결과가 발표된 뒤 다른 후보들은 선거 패배를 인정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멕시코 현지 시각 오전 12시 11분 기준 10% 개표가 이뤄진 가운데 오브라도르 후보는 49.8% 득표율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당선이 확정된 오브라도르 후보는 민족주의∙포퓰리즘 성향의 인물로, ‘멕시코의 차베스’ ‘좌파 도널드 트럼프’로 불린다.

2018년 7월 1일 멕시코 대선이 치러진 가운데 중도좌파 모레나(MORENA·국가재건운동)당의 후보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다.

◇ 멕시코, 사상 최대 규모 선거 치러…89년만에 좌파 정권

이날 멕시코 전역에서는 대통령과 상원의원 128석, 하원의원 500석, 멕시코시티 시장과 주지사, 지방의원 등 총 3400개 이상 직위를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8900만여명의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했다. 투표는 오전 8시부터 시작해 오후 6시 종료됐다. 서머타임(일광절약시간제) 영향으로 일부 주에서는 7시까지 투표가 치러졌다.

멕시코는 남미의 대표적인 우파정권 국가다. 멕시코 집권당인 중도우파 제도혁명당(PRI)은 지난 1929년 멕시코 정권을 장악했다. 2000년 중도좌파 민주혁명당(PRD)이 정권을 탈환했지만, 이 정당은 PRI보다 신자유주의적 성향이 더 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12년부터는 PRI가 다시 권력을 잡은 상태다.

우파정권이 지배한 멕시코는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빈곤, 불평등, 폭력사태에 시달렸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멕시코 경제는 연평균 2.5% 성장에 그쳐, 개발도상국 평균 속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치안 문제도 심각하다. 이날 오전 선거가 시작되기 직전 멕시코 노동당(PT) 여성 당원이 자택에서 괴한의 총격에 살해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멕시코 국민들은 ‘새로운 멕시코’를 외치는 좌파 정당을 주목했다. 선거 전 뉴욕타임스는 “이번 멕시코 대선은 전체 유권자의 약 40%를 차지하는 젊은층이 좌우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들은 좌파 정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짙다”고 전했다.

멕시코 유력 신문인 레포르마와 라디오센트로는 지난 28일 여론조사 결과 중도좌파 MORENA의 오브라도르 후보가 51% 지지율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중도우파 국민행동당(PAN)과 PRD의 연합 후보인 리카르도 아나야는 27%, 멕시코 집권여당 PRI의 후보 호세 안토니오 메아데의 지지율은 19%, 무소속 제이미 로드리게스의 지지율은 3%에 그쳤다.

오브라도르의 당선이 확정되면 멕시코에서는 89년 만에 진정한 좌파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라틴아메리카 정치 전문가인 제니퍼 피스코포 옥시덴털칼리지 조교수는 블룸버그에 “오브라도르의 당선이 유력한 건 멕시코 유권자들이 좌파정권을 선호해서가 아니고, 기존 멕시코 정부에 불만을 표출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멕시코 중도좌파 모레나(MORENA·국가재건운동)당의 후보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2018년 6월 17일 멕시코주(州)의 텍스코코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중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 ‘대선 삼수생’ 오브라도르…“포퓰리즘 공약, 현실성 없다” 비판도

오브라도르는 멕시코시티 시장을 지냈고 2006년, 2012년에 이어 3번째로 대선에 도전해 성공했다.

오브라도르는 우파정권을 ‘권력의 마피아’라고 부르며 부정부패 척결, 빈민구제 프로그램 강화, 무료 비료와 저가 유류 공급, 최저임금 인상,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추진 등 포퓰리즘적 공약을 대거 내세워 표심을 얻었다.

오브라도르의 민족주의적 면모도 경쟁력이 됐다.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미국 대통령)로부터 멕시코인을 보호하겠다는 공약과 민족주의적 수사가 오브라도르의 입지를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오브라도르는 대선출정 집회에서 “멕시코는 어떤 외국 정부의 피냐타(인형)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피냐타란 파티 때 눈을 가리고 막대기로 쳐서 넘어뜨리는 인형이다. 미국 등 외세의 압박에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것이다.

오브라도르가 당선될 경우 ‘멕시코 장벽’ ‘무역 관세’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미국과 멕시코 관계의 귀추가 주목된다. 오브라도르가 반트럼프 성향을 보여온 만큼 양국의 관계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오브라도르가 멕시코 정부에 새로운 민족주의 정신을 불어넣을 것”이라며 “이는 이미 시험대에 올라 있는 미국과 멕시코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고 전했다. 로베르타 제이컵슨 전 멕시코 주재 미 대사는 폴리티코에 “오르바도르는 멕시코와 미국이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자신의 최우선 과제라고 했지만, 그(오르바도르)가 멕시코 대통령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오브라도르 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멕시코의 다음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한다”며 “나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매우 기대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오브라도르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처럼 멕시코에 재정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오브라도르의 공약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고 전했다. 한 멕시코 유권자는 WP와 인터뷰에서 “오브라도르는 그의 정권에서 장미빛 미래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돈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오브라도르는 차베스와는 다른 ‘실용주의적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피스코포 조교수는 “오브라도르는 멕시코시티 시장으로 재임한 동안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기반시설에 투자하는 등 실용적인 행보를 보였다”며 “오브라도르는 급진주의자가 아니라 기술적 관료이며, 사업가적 기질이 있는 인물로,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 스타일의 독재 정권을 우려하는 것은 기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