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무대 위에 대형견 한 마리 풀어놓은 줄 알았대요."

치렁치렁한 머리의 뮤지컬 배우 차지연(36)이 웃었다. 머리칼도 눈화장도 흑단처럼 검다. 혈통 좋은 명마나 명견 같은 느낌이 있다. "워낙 맨발 체질이거든요. 마침 이번 역할은 무대 위에서 맨발이라 물 만난 고기 같아요." 차지연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여주인공 에스메랄다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서고 있다. 타고난 아름다움이 독이 돼 슬픈 운명을 맞는 집시 역할이다. "10년 전 첫 공연 오디션에서 떨어졌어요. '키가 너무 크다'고. 빈털터리 신인 배우 시절이라 3층 좌석에서 혼자 울면서 공연 보던 기억이 나요." 그로부터 10년을 기다려 얻어낸 역할이다.

18일 서울 양재동에서 만나 인터뷰하는 동안 차지연은 자주 큰소리로 털털하게 웃었다. 질문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길 때 그의 눈빛은 먼 곳을 바라보듯 아득했다.

차지연은 뮤지컬 '라이언킹'의 주술사 라피키로 시작해 아이다, 레베카, 마타하리 등 대작 주역을 도맡아 온 자타 공인 뮤지컬 디바. 목소리에 서린 특유의 슬픈 기운, 폭발적 에너지와 가창력도 정평이 났다. 이번엔 그 기운을 꾹꾹 눌러 넣은 절제된 연기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인 연출님이 '잊지 마 지연, 넌 카르멘이 아니라 16세 소녀야' 하셨어요. 고문받을 때도 '집시들의 공주란 걸 잊지 말라'고 하더군요. 우아하게 고문받는 소녀라니!" 그는 에스메랄다를 "연보랏빛"이라고 했다. "설익은 햇와인의 연보라색요. 동물이라면 타고난 위엄과 발톱은 갖췄지만 아직 어린 표범일 테고요."

그에게 가장 즐거웠던 역할은 서울예술단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명성황후역. "마음껏 소리지르고 뒹굴며 다 풀어헤치고 신나게 놀았죠." 가장 자신과 닮지 않은 역할은 뜻밖에 '마타하리'다. "전 세계 남성이 손 한번 잡아보려고 줄 서는 여자라는 거예요. 담배도 다리 꼬고 도도하게 앉아 피우라는데, 아유~ 정말 그런 거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그는 "실은 곱고 예쁜 여배우들이 하지 않는 배역에 도전하고 깨지며 저만의 결이 생겨난 것 같다"며 웃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에스메랄다를 연기하는 차지연.

18개월 된 아들 주호 얘길 꺼내자, 얼굴이 확 밝아졌다. "비관적인 성격이었어요. 밝은 역할 하면 안 어울리는 옷 입은 것처럼 어색했고. 근데 아들이 태어난 뒤 모든 게 바뀌었어요." 오래 그를 괴롭힌 불면증도 싹 나았다. "전엔 늘 수면제를 먹고 잤어요. 애 키우고 살림하며 공연까지 뛰는 지금은 베개에 머리만 붙이면 잠이 쏟아져요. 병원 갈 시간이 없어 그런가, 신기하게 목도 안 아프고요." 자장가로 들려주던 판소리 사랑가를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하며 따라 하던 아들은 요즘 에스메랄다 노래까지 따라 부른다.

그는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빈 잔'을 부를 때 코러스로 화제였고, '복면가왕'에선 '캣츠걸'로 5주 연속 우승도 했다. 잠깐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지만, 여전히 "빚 갚고 밥 먹고 살게 해 준 뮤지컬 무대가 목숨처럼 소중하다"고 했다. 긴 무명 시절을 거쳐 디바가 된 차지연은 "배우에겐 절실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간절하게 무대를 원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배우 몸에서 고스란히 풍겨 나와요. 평생 그 마음 잊지 않는 게 목표예요." 웃으며 말했지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결기가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