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형님 이야기 할 땐 뜨거운 눈물 - 이랜드그룹 야구 박물관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유니폼과 배트, 모자를 기증하기 위해 방한한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장훈. ‘사진 촬영을 위해 유니폼을 입고 배트를 드는 포즈를 취해줄 수 있느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배트를 잡은 그의 오른손은 약지와 붙은 새끼손가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만난 그의 181㎝ 키와 딱 벌어진 체격은 선수 시절처럼 늠름했다. 어머니와 형님, 딸들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44년 겨울 일본 히로시마(廣島). 네 살짜리 아이들 서너 명이 산에서 캐온 고구마를 모닥불에서 굽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막바지로 다들 굶던 시절. 가난한 아이들에겐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트럭 한 대가 후진했다. 아이 하나가 치였고, 오른손은 모닥불로 빨려 들어갔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달라붙었고, 엄지와 검지는 심하게 구부러졌다. 하지만 일본어를 못했던 아이 엄마는 트럭 운전사에게 치료비 한 푼 받아내지 못했다. 아이 이름은 장훈. 5년 전 가난을 피해 경상남도 창녕에서 도일(渡日)한 인동 장씨 댁의 막내아들이다.

갯가 판자촌에서 원룸 크기 다다미 6조(9.9㎡) 단칸방에 여섯 명이 살았다. 부모와 훈, 그리고 누나 둘, 형 하나. 막내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열두 살이던 큰 누나가 죽었다. "뜨거워"를 외치며 죽어가는 딸의 입에 어머니는 차가운 포도 한 알을 짜서 넣어줬다. 광복 이듬해 1946년에는 잠시 한국에 갔던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다. 어머니는 남은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밀주를 담갔고, 암시장에서 받아온 곱창을 구워 선술집을 열었다. 소년은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것도 배불리 먹고 어머니와 형, 누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야구 전설(傳說), 장훈(78). 지금도 깨지지 않는 일본 프로야구 최다 안타 기록 3085개.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과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 두 개의 영광을 차지한 남자. 이랜드그룹이 만드는 야구박물관에 선수 시절 사용한 물품을 기증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만났다.

'여자, 술, 도박'을 참아라

양손으로 양복 깃을 살짝 올려 잡으며 턱을 들었다. 입가에 스민 미소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선수 시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들었다"고 하자,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마침 이날은 넥센 소속 야구 선수들이 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려 했다는 기사로 시끄러웠을 때다. 그 말을 들은 장훈은 "그런 친구들은 야구를 빨리 그만두는 게 낫지"라며 단호히 말했다.

"선수가 가진 재능은 다 같은데, 다른 점은 '자기 관리'야. 그게 승부수지. 야구 선수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게 '여자, 술, 도박'이야. 제일 나쁜 게 여자. 정력이 사라지니까. 두 번째는 술. 야구 시즌은 5개월이야. 그 기간을 참는 게 관건이야. 나랑 우리 집사람은 48년을 같이 살고 있는데 선수 시절 참던 게 습관이 돼 지금도 한 침대에서 잘 안 자. 물론 한두 번은 하지. 내가 방 안에 있는 종을 딸랑딸랑 흔들면, 마누라가 내 방으로 베개를 들고 와. 딸들이 자니까 문 잠그고 하는 거야. 지금도 가끔 장난으로 종을 흔들지(웃음)."

―각방 쓸 필요까지야.

"난 야구 선수들이 결혼하면 전부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돈은 많이 벌고, 힘은 넘치고, 옆에는 젊은 아내가 있고. 당연히 하고 싶잖아. 배 고픈데 먹지 않는 바보가 어디 있어. 그래서 난 다른 방에서 잔 거야. 내 침대 옆에는 배트가 2개 있었지. 자다가 새벽 2~3시쯤에 일어나서 배트를 휘둘러. 구장에서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게 분하고 불안하니까. 그런데 같이 자면 그 모습을 보고 와이프가 딸한테 '너희 아빠 미쳤나 보다' 할 수 있으니까."

―그럼 다음 날 경기에서 더 피곤할 텐데요.

"난 오른손 장애 때문에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배트를 잡을 수 없었어. 글러브를 끼기에도 불편했어. 그런 상황에 3000안타 치려면 날마다 긴장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해. 긴장을 술로 쉽게 풀려고 했다면 난 평범한 선수가 됐을 거야. 난 스윙으로 풀었어. 밤에 암흑 속에서 휘두르다 보면 마음의 공이 떠올라. 혼을 불어넣어 그 공을 치는 동안 긴장은 사라지고 오기가 생겨. 그런 날은 깊은 숙면에 빠질 수 있었지."

―사모님 고생도 많으셨겠습니다.

"와이프도 재일 교포인데 도쿄(東京) 야구 선수 파티장에서 만났어. 여성 잡지의 기자였지. 전화번호를 안 가르쳐줘서 시즈오카(靜岡) 집까지 찾아갔어."

―선수 시절에 인기가 많으셨다고 들었는데요.

"호텔 방을 (여자들이) 노크하고 그랬어. 자랑하는 거야(웃음). 그런 걸 딱 잘라서 참을 수 있어야 해. 후배들이 지금은 모를 거야. 은퇴하고 나면 엄청나게 후회한다는 걸. 선수 시절은 짧고, 그 후의 인생은 더 기니깐. 꾹 참은 시즌 5개월이 모여서 선수 생활 전체, 그리고 인생 전체가 되는 거지."

―미국 구단 중에는 여자·술 등을 장려하는 곳도 많지 않나요?

"그건 민족이 달라서 그래. 체격도 다르고. 야구 선수 생명은 열심히 노력해도 20년 정도. 그동안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나중에 죽고 싶을 만큼 후회해. 남들은 나보고 성공했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어. 그때 더 충실했다면 더욱 성적이 좋지 않았을까 하고. 난 2등인 적이 많았어. 모두 2등도 정말 잘한 거라고 하는데, 나는 한 달 동안 밥을 먹을 수 없었어. 스포츠 선수는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올림픽 선수에게도 금메달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내게 '만족'이란 없었어."

―가장 큰 라이벌은 누구셨나요?

"지기는 여러 사람에게 졌어. 내가 수위 타자를 7번 했는데, 그럼 나머지는 못 한 거 아냐. 여러 사람에게 졌다는 거지. 그래도 가장 큰 라이벌은 나 자신이야."

―선수 생활 중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은.

"딸들이 대여섯 살 때 운동회나 소풍 갈 때 '아빠는 왜 안 와? 친구 아빠는 오는데'라고 말할 때야. 나는 '아빠는 오늘 야구를 하는 날이야'라고 답하지. 그리고 구장에 가면서 눈물을 흘렸던 적도 있어. 나야 가정에도 충실하고 싶고, 야구도 잘하고 싶어.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일을 우선하는 게 남자야. 지금은 그게 제일 후회돼.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 전 요미우리 감독도 그 부분이 지금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그래. 시게오 감독 자녀들이 네 명이 있는데 모두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어. 엄마가 빨리 돌아가신 것도 아버지 탓이라고. 남자는 아픔을 입으로 말하지 않잖아. 안 그래? 남자는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거든."

197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안타를 치고 있는 장훈. 그는 오른손잡이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사고로 좌타자가 됐다.

3년 뒤를 보고 지금 노력하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절, 장훈은 수많은 귀화 제안을 받았다.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오가와 구단주는 그에게 양자 입양을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귀화하지 않았다.

―오가와 구단주 양자였다면 일찍부터 더 화려한 삶을 사셨을 텐데요.

"(고개를 저으며) 그럴 거면 엄마가 야구 그만두라고 했어. 그 말이 나온 게 한 팀당 외국인 선수를 3명으로 제한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는데. 어머니 말씀을 구단주에게 전하니깐 '야, 역시 한국 여자'라며 박수를 쳤어. 그리고 그때 규정을 바꿨어. 15년 전에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은 일본인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야."

―몸담았던 팀 중 자이언츠 시절 장비를 기증품으로 갖고 오셨습니다.

"난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싶었어. 39개 안타만 더 치면 기록이 3000개가 되니깐 2개월만 더하고 은퇴하려고 생각했어. 그런데 신격호 롯데 회장님이 요미우리 회장님을 만나서 '장훈이를 달라'고 했대. 나중에 감독시킬 거라고."

―그런데 왜 감독은 안 했나요.

"내가 감독을 안 한 것이 일본 야구 7대 불가사의래. 롯데에서 두 번 감독 제의가 있었고, 닛폰햄에서 한 번 있었어. 근데 어머니가 내가 감독하면 힘들어서 죽는다고 하지 말라 하시더라고. 남한테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내가 이용일(KBO 초대 사무총장), 이호헌(사무차장)과 KBO(한국야구위원회)를 만들었잖아. 그 후에 삼성 이건희 회장이랑 밥을 먹는데, 이 회장도 나한테 삼성 감독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 내가 '그런 소리 마시라'며 거절했어. 대신 선수는 많이 보내주겠다고 해서 많이 보냈지. 김일융이랑, 장명부랑."

―감독하셨으면 더 많은 선수를 키우셨을 텐데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웃음), 그래도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감독은 고독한 자리야."

―최근 일본 무대에 진출했던 한국 선수들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이승엽이나 이대호나 인간성은 좋은데, 근성은 없다고 할까. 유명하니까 여기저기에서 식사라던가 술자리에 초대받는 경우가 많아. 다음 날 연습이 있으면 (오후) 10시 정도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늦게까지 같이 있으니 안 돼. 사람이 좋아서 먼저 가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고. 아쉬워. 한국 선수들은 힘도 좋고, 감각도 있는데, 지속이 안 돼. 꾸준히 노력하지를 않아. 일본에는 '3년 뒤에 실력이 향상되고 싶다면 지금 필사적으로 노력하라'는 말이 있어."

―선수 시절 은인을 한 분 뽑으신다면요?

"첫 배팅 코치인 마쓰키 겐지로(松木 謙治郞)씨야. 난 그에게 오른손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내 타구만 보고 오른손이 약하다고 단번에 지적하더라고. 난 나니와 상고 시절부터 장거리 타자로 유명했어. 홈런 타자가 되고 싶었지. 그런데 마쓰키 코치는 내게 중거리 타자를 권하더라고."

―오른손 장애에 대해 코치에게 말하지 않으셨나요?

"난 손 상태에 대해 은퇴하고 밝혔지, 현역 때도 말하지 않았어. 변명거리가 되니깐. 지금도 사람들이 손을 보면 깜짝 놀라지. 야구를 할 수 있는 손이 아니거든.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셔서 사진도 잘 안 찍었어."

국적보다 중요한 건 성실한 삶

장훈은 인터뷰 중 두 번의 눈물을 흘렸다. 한 번은 딸들 이야기를 할 때, 또 한 번은 어머니와 형님 이야기를 할 때였다. 두 번째 눈물은 멈추질 않아 인터뷰를 잠시 중단해야 했다.

―인생의 은인은 누구신가요?

"어머니와 형님이지. 형님이 나랑 열 살 차이가 나는데, (내가 오사카에서 유학하던) 16세 때부터 3년 동안 한 달에 1만엔씩 보내주셨어. 형님이 택시 운전사였는데, 그 당시에는 잠 안 자고 일하면 한 달에 1만8000엔 정도 벌 수 있었대. 형님이 당시 26세. 실컷 놀고 싶은 나이였지. 받은 1만엔 중 4500엔이 하숙비, 나머지 5500엔은 목욕탕 가거나 노트 사거나 했는데 부족했지. 그래도 형님 생각해서 아껴 썼어. 나니와 상고 시절에 난 자이언츠에 입단 제의를 받은 적이 있어. 그 말을 형님에게 했더니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야구를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학교는 다녀야 한다'고 하셨어. 그 말을 들은 야구부 담당 선생도 '정말 훌륭한 형님을 두었구나'라며 그 뜻에 따르게 했지. 형님은 아버지였어."

―야구를 안 했다면, 뭘 하셨을까.

"형님은 내가 야쿠자가 될까 걱정하곤 했는데, 내 성격이 그렇게까지는…. 난 형처럼 택시기사나 덤프트럭 운전기사가 됐을 거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난 어머니가 주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아침 일찍 일어나시고, 밤늦게 주무셨어. 내가 처음 프로 야구팀에 들어갔을 때 계약금이 200만엔이었는데, 그럼 지금의 5000만엔 정도일까. 형님이랑 오사카에 가서 계약하고, 히로시마까지 기차로 8~9시간 걸리던 시절이야. 신문지에 계약금을 싸서 형님이 주무실 때는 내가 돈을 갖고 있고, 내가 잘 때는 형님이 들고 있고. 그 돈을 어머니께 드리니 '훈이야 무슨 나쁜 짓 한 거냐?'며 깜짝 놀라시더라고. 어머니가 83세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처럼 기뻐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요즘 하루 일과는.

"지금은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건강하고, 인기도 많고, 최고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밖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식사를 해. 일요일은 아침 8시에 TV에도 나와 야구 해설을 해. 그리고 일본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초등학교·중학교 야구 교실에도 가. 자원봉사로 가르치고 있어."

―장훈에게 야구는.

"야구가 곧 인생이지."

―장훈에게 한국은.

"내가 한국에 처음 온 건 (한국인이라) 고시엔대회에 나가지 못하고 한·일 친선 고교야구에 출전했을 때야.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는데 가슴이 찡하더라고. 난 조국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어. 국적은 종이 하나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민족의 피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깐. 그러나 그런 얘기를 표면적으로 하는 건 글로벌 시대에는 맞지 않지. 어디서 어떻게 살던지 성실하게 살길 바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