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아파 죽는 줄 알았어요. 매 장면 찍을 때마다 '어떡하지, 내 밑천이 드디어 바닥나는구나. 그동안 잘 숨겨왔는데 이제 망했구나' 했으니까요."

김희애는“어려웠어요, 항상.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해서 지금까지 온 거예요”라고 했다.

12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배우 김희애(51)는 자주 눈을 질끈 감고 무릎 위로 둥글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때마다 눈꺼풀이 엷게 떨렸다. "매 순간 벽이었어요. 부산 사투리도 해야죠, 일본어도 줄줄 읊어야죠. 아휴, 다시 한다면 그렇게는 또 못 할 것 같아요(웃음)."

김희애는 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6년 동안 치러낸 재판을 돕는 부산 지역 사업가 문정숙을 연기했다. 문정숙은 자신의 재산을 헐어 재판 비용을 대고 일본 법정에 서서 할머니들 증언을 통역한다. 사업가로 잔뼈 굵은 문정숙을 소화하기 위해 김희애는 체중을 5㎏ 늘렸고 얼굴에는 주름을 그리고 흰머리도 만들었다. '의외의 변신'이라는 말을 듣는다.

김희애는 그러나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이런 역할을 안 할 이유가 없죠. 여배우는 20대만 넘겨도 들어오는 역할이 뻔해요. 모처럼 만난 입체적 캐릭터인데, 무조건 해야 했어요."

촬영은 그래도 힘들었다. 3개월간 밤낮으로 부산 사투리와 일본어를 연습했건만 한 장면 찍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곤" 했다. 일본어 대사 한 줄 외우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감독이 "말맛이 살지 않는다"면서 대사를 즉흥으로 바꿀 때면 식은땀이 났다. 악몽까지 꿀 정도였다.

김희애는 "'이 영화 정말 사람 잡는다' 싶었다"며 웃었다. "김해숙·예수정 선배도 '이번 촬영이 유난히 힘들다'고 하소연하셨어요. 함께 고민하고 머리 찧으면서 또 앞으로 나아갔던 것 같아요."

데뷔 30년 차를 넘어선 그다. 대중은 김희애를 여전히 자로 잰 듯 반듯한 모습으로 기억한다. 김희애는 "그건 정말 제 모습은 아닌데요"라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모르겠어요. 나름대로 연기 변신도 해봤고 예능에도 나가봤지만 많은 분이 여전히 그런 모습으로 기억해주시니까.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편이긴 해요. (웃음)." 김희애는 둥글게 쥐었던 주먹을 풀고 손바닥을 활짝 펴 보였다. "앞으론 이렇게 풀어지는 모습도 보여 드려야 하나 봐요. 잘될진 모르겠지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