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한국GM 비정규직 해고자 권순철(42)씨는 한 공장에 면접을 봤다. 채용 담당자는 이력서에서 나이를 제일 먼저 훑었다. 그러나 아직 합격 전화를 받지 못했다. 권씨는 "공장에도 사람이 몰리니까 나이 많은 사람은 잘 찾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스물넷에 비정규직으로 군산 공장에 들어왔다. 회사 사정이 좋던 2000년대 중반 무렵엔 정규직으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2012년 무렵부터 잔업이 줄더니 최근 몇 년 동안은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많았다. 권씨는 지난 2월 해고 통보를 받았다. 최근엔 경기도에 있는 회사에도 이력서를 냈다. 그는 "군산엔 일자리가 없으니 떠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떠나는 사람들
지난 3일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현대·기아차 협력업체 채용박람회'. 군산고용센터 앞에서 출발한 버스 두 대가 도착했다. 내린 이들은 70여 명의 GM 비정규직 해고자들. 수십 번 고쳐 썼을 이력서를 품에 들고 채용 부스 앞을 서성였다. 최대 관심사는 '군산에서 출퇴근이 가능한지' '거리가 멀다면 기숙사가 있는지'였다. 이민철(39·가명)씨는 "월급 몇 푼 더 받는 것보다 무조건 기숙사 있는 곳에 가고 싶다. 주말 부부는 각오하고 있다"고 했다.
조진수(40·가명)씨는 GM 하도급 업체에서 일하다 2015년 일자리를 잃었다. 아내는 "군산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친정인 경기도 시흥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를 장모에게 맡기고 자신도 다시 일을 구하겠다고 했다. 요즘 조씨는 시흥에서 처가의 식당 일을 돕고 있다. 인근 공단에서 온 근로자들이 식당에서 종종 단체 회식을 한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며 "평생 공장에서 일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다른 일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고 했다.
군산을 떠나야 하는 이는 공장에서 잘려나간 사람만이 아니다. 회사에 남은 600여 명은 부평·창원 공장으로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 GM 정규직 최민철(47·가명)씨, 김민재(46·가명)씨도 그렇다. 최씨는 익산에서, 김씨는 전남 여수의 하도급 업체에서 일하다 군산에 왔다. 지난 3월 2일은 1차 희망퇴직 신청 마감일이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남는 쪽을 택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생으로 어리다 보니 불안해서 퇴직은 못하겠더라"고 했다. 지난 29일 회사 측은 생산직 200명만 전환 배치하고, 나머지 400여 명은 3년간 무급 휴직을 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6월 1일 전환 배치 명단에 포함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최씨는 "하루라도 빨리 군산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 문을 닫은 현대중공업 조선소 관련 일을 했던 이 중 상당수는 벌써 군산을 떠났다. 가장(家長)의 부재로 가족은 흩어진다. 현대중공업 협력업체에서 일했던 김기혁(42, 가명)씨는 올 초 옛 동료 4명과 전주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는 "전주는 그나마 군산보다 경기가 좋아서 일자리가 있고, 일당도 2만~3만원씩 높다. 여기서 동료와 지내며 일을 하다 한 달에 한두 번 군산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아이 셋은 군산에서 아내가 키운다. 생활비가 빠듯해 이미 아이들 학원도 줄이고 한 달 14만원씩 하는 통학 버스도 끊었다.
◇비어가는 도시
일자리가 늘면 젊은 층이 유입되면서 출산도 많다. 군산은 지금 그 반대를 경험하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군산 소룡동. "어머님 잘 들어가시고 내일 봬요." 고정훈씨가 노란 승합차에서 어르신 한 분을 집앞에 내려줬다. 고씨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승합차에 태우고 다니는 건 3~5세 어린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올 초 어린이집 정원을 채우지 못해 문을 닫고 노인복지센터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2012년 2층짜리 어린이집을 열었다. 첫해, 둘째 해엔 입소를 기다리는 아이가 40~50명에 달했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원생 숫자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 철수설이 흘러나온 때였다. 입소 대기자는 사라졌고, 지난해 말부터는 아예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게 됐다. 고씨는 결국 교사 7명과 영양사 한 명을 해고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아이들을 위해 사놓았던 각종 교구와 장난감은 중고 업체에 팔았다. 트럭 세 대 분량이었다. 군산에선 올해 들어서만 비슷한 이유로 어린이집 5곳이 폐업했다.
사람이 떠나며 이삿짐 업체는 호황을 맞았다. 이삿짐 업체에서 일하는 주연(46)씨는 지난 4월 조촌동 한 집의 이사 의뢰를 받고 방문했다. 옷장 한쪽에 GM 작업복이 걸려 있었다. 30대 중반의 부부, 두 초등학생 아들을 둔 가정이었다. GM 직원이었냐고 물어보자 "공장이 폐쇄돼서 이사 간다"고 했다. 고객은 경기도 평택으로 이사했다. 개인 사업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오전 9시 이사를 진행하는 동안 고객은 "앞으로 아이들 교육비가 많이 들어서 걱정"이라며 뜨문뜨문 걱정을 내비쳤다. 오후 4시에 이사가 마무리됐다. 그는 "요즘 들어 이사 가는 사람 중 GM 직원을 한 달에 두세 건씩은 본다. 돈을 벌어 좋긴 하지만 마음 한쪽이 씁쓸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