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송파구에 사는 이모(42)씨는 두 아이를 돌보는 조선족 가사도우미가 수시로 자신의 건강보험증을 빌려 쓴다고 했다. 감기나 몸살 같은 잔병치레부터 치과나 당뇨병 진료까지 건강보험 혜택을 누린다. 이씨는 "가사도우미가 건강보험증 때문에 돌보미 일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라면서도 "괜히 밉보이면 아이들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매번 빌려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2 서울 강남구에서 이비인후과를 운영하는 A원장은 진료를 하다 보면 남의 건강보험증을 들고 온 것처럼 보이는 외국인 환자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심이 가더라도 대부분 못 본 척 넘어간다고 한다. 실제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데다 어차피 같은 고객인데 진료를 봐주는 게 병원 차원에서도 이익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A원장은 "도용 문제는 정부가 제도적으로 막아야지 병원이 함부로 고객을 가려 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25일 국회 보건복지위 김승희 의원실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외국인이 남의 건강보험증을 빌리거나 도용하다 적발된 경우가 7만4675건에 달한다. 2013년 1만97건에서 2016년 1만9979건으로 배 가까이 늘어났다. 전문가들은 "그나마 적발된 경우도 빙산의 일각이고 실제로는 도용 사례가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외국인이 건강보험증을 이용해 무임승차해도 건보공단이 이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건보공단이 타인의 건강보험증을 빌려 쓰거나 도용하는 범죄를 확인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일부 진료 내용을 당사자에게 실제로 받았는지 확인하거나 △건보 가입자로부터 자신이 이용하지 않은 진료 내역을 신고받거나 △요양 기관이 제보한 내용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건강보험 가입 당사자나 병원에서 쉬쉬하면 도용 사례를 적발하기가 어렵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조사 방법상 한계 때문에 외국인이 남의 건강보험증을 이용해 건보 혜택에 무임승차하는 경우를 모두 잡아내지는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강보험 대여·도용한 외국인에 대한 환수 조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 많다. 중국인 김모(67)씨는 건강보험증을 도용해 가슴 종양 치료를 받으면서 4100만원을 부당하게 타갔지만, 건보공단은 400만원을 돌려받는 데 그쳤다. 외국인이 건강보험증을 도용한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더라도 당사자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라면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다. 한 건강보험 전문가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추진하면서 국민이 낼 건보료는 앞으로 몇 년간 계속 인상될 것으로 보이는데, 건보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 외국인 때문에 건보 재정이 줄줄 새 나가는 상황을 내버려둔다면 문제"라고 말했다.

사공진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미 전산으로 건강보험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인데 여전히 건강보험증 도용 문제가 발생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며 "건강보험증을 카드 형태로 도입해 도용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