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83년 전 중국 공산당 상황은 참혹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에 쫓기고 쫓겨 남동부 장시(江西)에 있던 근거지를 북서부 산시(陝西)로 옮기는 장정(長征·1934년 10월~1935년 10월) 중이었다.
8만5000여 명이던 홍군(紅軍·공산당 무장 세력)은 장정 직후 5000~7000명 선으로 급감했다. 궤멸은 시간문제였다. 마오쩌둥은 어떻게 이런 열세를 뒤집고 대륙을 집어삼키는 역전을 했나?
장제스가 국공(國共)합작 세력에 감금당한 시안사변(西安事變·1936년 12월 12일)이 그 분수령으로 꼽힌다. 마오는 사변 직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화해, 중국인의 단결 등을 외치며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톈안먼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1949년 10월 1일) 후 그는 표변했다. 6년에 걸쳐 자국민을 상대로 피의 숙청을 벌인 것이다.
시안사변은 경고한다. 압도적인 군사력도 경제적 우위도 최후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제 봉쇄와 군사 공격으로 궤멸 위기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먼저 내부를 안정시키고 이후 일본을 물리친다)의 기치를 내걸고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1931년 장시성에 수립된 중화 소비에트 정부를 비행기 150대와 최대 70만명의 국민당군으로 포위하고 대공격을 가했다. 1933년엔 홍군 소탕을 위해 소비에트 일대에 경제 봉쇄도 실시했다. 홍군 사령관 주더(朱德)의 목에는 포상금 10만위안이 걸렸다.
궤멸 위기에서 홍군은 1934년 10월, 장시성 탈출을 결행했다. 홍군 병사들은 국민당군의 공격 외에 발진티푸스와 설사에 시달렸다. 식량이 모자라 쥐를 잡아먹으며 산시성까지 1만5000㎞를 이동했다. 국민당군이 무서워서 후난(湖南) 방향 행군을 포기하고 구이저우(貴州)로 멀리 우회했다.
◇시안사변, 마오에게 '회생' 숨통 터주다
장쉐량(張學良)은 서북 지역 공산당소탕사령부의 부총사령이었으나 만주 군벌이던 아버지 장쭤린(張作霖)이 일본 관동군에게 폭사당한 뒤 공산당보다 일본에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장제스가 '최후의 5분'이라고 부른 멸공 작전을 고수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모두 중국인인데 왜 골육상쟁을 벌이는가. 공산당과의 협상은 불가능하지 않다."
중국 공산당은 그런 장쉐량에게 접근했다. 마오쩌둥은 "통일전선을 구축해 장쉐량의 부친을 죽인 일본 침략자들을 무찌르고 만주를 되찾자"고 꼬드겼다. 1936년 4월 장쉐량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비밀리에 만나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 노선을 걷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8개월 뒤 마침내 장쉐량은 총부리를 거꾸로 겨눴다.
12월12일 새벽 장쉐량의 부하들은 마침 시안을 방문해 화칭츠(華淸池·당태종과 양귀비의 겨울 휴양지)에 머물고 있던 장제스를 급습했다. '시안사변'이다. 빗발치듯 총성이 울렸고 호위병들이 거꾸러졌다. 놀란 장제스는 틀니도 챙기지 못하고 숙소 뒤편 3m 높이 담을 넘어 뒷산으로 도망쳤다. 담에서 뛰어내릴 때 다친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체포 당시 장쉐량 측 장교의 등에 업혀 하산한 장제스는 치욕과 분노에 떨며 소리쳤다. "나를 사살하라!"
장쉐량은 그를 감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언론에는 '모든 내전을 중지할 것' 등 8개 요구 조건을 발표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살해될 경우 역풍을 우려한 소련 코민테른이 중국 공산당에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닷새 뒤인 17일 저우언라이가 시안을 방문해 장쉐량에게 "8개 요구 조건 중 어느 정도만 약속받으면 장제스를 풀어주라"고 권고했다. 이어 장제스를 만나 "공산당은 당신의 영도하에 항일전을 수행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장제스는 12월 25일 석방돼 난징(南京)으로 돌아갔다.
시안사변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민족주의 불길이 타올랐다. 시안에선 시민과 학생, 군인들까지 '내전 중지' '항일 투쟁'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장제스는 억류 당시 어떠한 합의문에도 서명하지 않았으나 민심에 떠밀려 공산당 섬멸을 미뤄야 했다. 마오는 시간을 벌었다.
◇'중화민족끼리'로 200여만명 처형
기사회생한 마오쩌둥은 유화 공세를 한동안 지속했다. 온건 이미지를 심기 위해 지주들에 대한 학살을 중단했다. 산시성 주변 지방군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외국인 목사와 전도사를 초청해 종교 행사도 열었다. 그에게 중일전쟁은 또 한 번의 기회였다.
마오는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고 국민당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챙기는 데 힘썼다. "장제스와 연합해 항일전쟁에 나서라"는 스탈린의 요구도 묵살했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코민테른 총서기는 "중국을 점령한 외세와의 싸움을 소홀히 하고 거국적인 통일전선 정책을 명백하게 벗어났다"고 마오를 비난했다. 착실하게 세(勢)를 불린 홍군은 일본 패망에 즈음해 90만명의 대병력 무장 집단으로 발돋움했다. 이후 항일전쟁으로 지치고 부패한 국민당군과 내전을 벌여 승리했다.
중국 대륙을 석권한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 집권에 반대하고 정부의 대외정책을 공격하며 반혁명 청산운동을 공격하는 자들'을 적(敵)으로 규정하고 국민을 학살했다. 각 성(省)에 총살해야 할 반혁명분자 할당량이 정해졌다.
광둥에서는 1951년 4월 한 달에만 1만명 넘게 처형당했고, 5월에는 허난, 허베이, 후난, 광둥, 광시 등 중남부 지역에서 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오쩌둥은 1957년 "70만명이 죽고 250만명이 체포됐다"고 언급했다. 영국 역사학자 오드 아르네 베스타는 이보다 훨씬 많은 200만~250만명이 1949~1955년 사이에 처형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장제스의 아내 "그를 죽이진 말라"… 장쉐량, 아흔 넘어 軟禁 풀려나
1993년 리덩후이 총통이 해제, 하와이로 이주해 2001년 사망
장쉐량은 장제스를 풀어준 뒤 그를 따라 난징에 갔다가 곧장 연금당했다. 이 선택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장쉐량과 함께 시안사변을 일으킨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은 국외로 도주했다가 "함께 일본을 물리치자"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고 돌아온 뒤, 국민당 비밀경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宋美齡) 덕분에 장쉐량이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도 있다. 쑹은 결혼 전 잘생긴 유부남이던 장쉐량과 친밀했는데, 시안사변 후 남편에게 "장쉐량을 손대지 마라"고 당부했다는 것. 쑹메이링은 이후 장쉐량을 보살피며 옷을 선물하고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1937년 1월 장제스의 고향인 저장성 펑화(奉化)에서 시작된 장쉐량의 연금은 56년간 이어졌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쉐량은 "일본군과 싸우게 풀어 달라"는 편지를 장제스에게 보냈으나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니 독서에나 열중하라"는 차가운 답장을 받았다. 이후 대만으로 끌려간 장쉐량은 1954년 타이베이 교외에서 장제스와 17년 만에 재회했다. 장쉐량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시안사변을 참회하는 20만자의 '자아비판서'를 제출했지만 장제스는 끝내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1993년 리덩후이 대만 총통의 연금 해제 조치로 자유를 되찾은 장쉐량은 하와이로 이주해 2001년 100세(또는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한 책: 장제스 평전(조너선 펜비), 마오(장융·존 핼리데이), 西安事變과 張學良(조일문), 잠 못 이루는 제국(오드 아르네 베스타), 중국인 이야기(김명호),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이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