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경영'을 내세우며 23년간 LG그룹을 이끈 구본무 LG회장이 20일 오전 만 73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해 4월 뇌종양이 발견돼 몇 차례 수술을 받고 통원 치료를 받았지만, 최근 상태가 더 나빠졌다.

LG가(家) 3세인 구 회장은 LG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손자이자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구 회장은 집안의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1995년 2월 나이 50세에 경영 승계를 받았다. 당시 구 명예회장 건강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지만, 그는 한국 기업사에서 이례적으로 일찍이 경영권을 넘겨 승계 리스크(위험)를 최소화했다. 구 명예회장이 일선에서 후퇴했을 때 지금은 고인인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평회 LG상사 회장, 구두회 호유에너지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등 창업세대들도 함께 물러났다.

1995년 2월 22일 LG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본무 신임 회장이 LG 깃발을 흔들고 있다

구 회장은 외환위기 등의 위기를 넘기고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 3개 핵심 사업군을 바탕으로 LG를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회장 취임 1년 뒤인 1996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10년 내 LG를 세계적 우량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이뤄냈다. 그가 취임하기 전인 1994년 30조원대였지만, 지난해에는 160조원대로 5배 이상 늘었다. 이 과정에서 GS, LG가 계열분리됐다. 해외 매출도 같은 기간 약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급증했다. 임직원 수도 같은 기간 약 10만명에서 약 21만명으로 늘었다. 이중 8만여명이 200여개 해외 현지 법인과 70여개 해외 지사에 근무 중이다.

구 회장은 1945년 2월 1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를 거쳐 미국 애슐랜드대학교를 졸업했다.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회장직에 오르기 전까지 20년간 철저한 경영수업을 받고 회장직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인 구 명예회장은 은퇴 배경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구본무 회장이 주력회사인 LG화학과 LG전자의 경영·심사·수출·기획 업무 등을 두루 거치면서 20여 년간 다양한 실무경험을 쌓은 데다 젊은 만큼 강한 추진력을 갖고 일을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말했다.

구 회장은 1975년 LG화학 심사과 과장으로 입사해 본격적인 경영자 수업을 받았다. 이후 1979년 LG화학 유지총괄본부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LG전자 기획심사본부장으로 활동한 후 이듬해 이사로 승진했다. 1984년 LG전자 일본 동경주재 상무, 1985년 그룹 회장실 전무, 1986년 회장실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본격적인 경영 활동을 했다. 구 회장은 1989년 LG그룹 부회장에 오르면서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임됐으며 1995년 LG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부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구 회장은 그룹 명칭을 ‘럭키 금성’에서 ‘LG’로 바꾸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 회장은 아래로는 동생 5명이 있다. 차례로 딸 구훤미씨, 아들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딸 구미정씨,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이다. 작년부터는 건강이 나빠지면서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에게 사실상 그룹 경영을 맡겨왔다. 구 회장은 결혼은 김태동 전 보건사회부 장관의 딸인 김영식씨와 했다. 자녀로 딸 구연경씨, 구연수씨를 두고있다. 김영식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닌 민화작가다. 2004년에는 동생인 구본능 회장의 아들 구광모 LG전자 상무를 양자로 입적했다.

구 상무는 29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지주사 등기이사로 선임될 계획이다. 구 회장을 이어 4세 경영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구 상무는 2006년 LG전자 재경 부문 대리로 입사해 12년간 경영수업을 받았다.

구 회장은 성품이 소탈하고 사교적이라 해외 출장에서도 도착지 공항에 주재원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저녁 자리가 늦어지면 운전기사를 돌려보내고 택시로 귀가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삼성, 롯데, GS, 현대차, 한화, SK 등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지난해 12월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다. 당시 구 회장은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사이다 답변'을 이어가며 국민들의 호감을 샀다. 그는 청문회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 관련질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정부 압박에 따른 기부금 출연 문제에 대해서는 "국회가 입법을 해서 막아달라"고 역제안하기도 했다. 구 회장은 "전경련은 헤리티지 단체처럼 운영하고 친목 단체로 남아야 한다"는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다. LG그룹이 2003년 일찍이 국내 재벌기업 중 처음으로 지주사체제로 전환한 것도 그가 진솔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는 청문회에서 재벌총수 중 처음으로 전경련 탈퇴를 선언하고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승부욕과 뚝심도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는다. 그는 2005년 이차전지 사업이 2000억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을 당시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고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며 밀어붙였다. 그 결과 LG화학은 중대형 이차전지 분야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구 회장은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에서 이기려는 승부 근성"이라는 좌우명을 지닐 정도로 승부욕도 강하다.

취미로는 '탐조(探鳥)'를 즐겼다. 탐조는 자연 상태에 있는 새가 놀라지 않게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LG상록재단이 2000년 발간한 '한국의 새' 인사말에서 구 회장은 "한 종의 새가 멸종하기까지 100종이 넘는 생물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며 "새는 생태계의 정점(頂點)에 위치하여 그 생태는 자연 환경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고 언급했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정도경영으로 사회적 책임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LG복지재단은 2015년부터 'LG의인상'을 만들어 국가와 사회 정의를 위해 희생한 의인한테 상을 주고 있는데 이는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구 회장의 뜻을 반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