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보리'의 덕을 보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쌀이 부족해 보리를 섞어 혼식(混食)을 해야 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말이다. 맥주나 몰트위스키처럼 보리로 만들어진 술 덕분이다. 그런데 음식과 식재료 중에서도 이 보리의 덕을 보는 것들이 있다.

어떤 새우는 이름을 빌려와 보리새우로 불린다. 보리 이삭을 똑 닮은 이 새우는 몸의 길이가 20㎝ 내외가 될 정도로 크고 살맛이 진해 우리 연안에서 잡히는 새우 중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한다. 물론 우리에게 더 친숙한 '보리새우'는 보리 낟알처럼 자잘한 건새우다. 정호승 시인은 이를 두고 '엄마하고 건어물 시장에 갔다/ 보리새우를 파는 가게가 많았다/ 새우가 사는 바닷속에도/ 보리밭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라고 맑고 천진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숭어도 '보리'의 이름을 빌려온다. 보리 이삭이 패는 봄철에 가장 맛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굴비는 보리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냉장 시설이 없던 과거의 사람들은 말린 조기를 더 오래 그리고 더 맛있게 보관하기 위해 겉보리가 가득 담긴 항아리나 뒤주에 묻어두었다. 보리는 조기에서 나오는 수분을 흡수해 부패를 막는 동시에 향을 더하고 비린내를 잡는 역할을 한다. 서해의 생태계 변화로 조기가 더없이 귀해졌다지만 다행스럽게도 같은 민어과 생선 '부세'로 우리는 여전히 이 보리굴비를 즐길 수 있다. 보리굴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호남 지방까지 가지 않아도 말이다.

강변북로를 달려 서울 마포구를 지나 고양시 초입에 들어서면 행주산성이 나온다. 이 근방의 화정가든. 호남 지방의 푸짐한 상차림과 정성스럽게 쪄낸 보리굴비를 내오는 곳이다. 열대여섯 가지의 밑반찬이 나오고 곧이어 '어떻게 다 먹을까' 싶을 만큼 수북한 고봉밥이 나온다. 그런데 밥의 색이 조금 낯설다. 연두 혹은 초록의 빛깔. 이는 전남 보성에서부터 공수해온 녹차 가루를 넣어 밥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녹차밥을 함께 나오는 시원한 녹찻물에 말아두면 보리굴비를 먹을 준비가 끝난다. 굴비가 내는 특유의 고릿함과 짭조름함은 이 쌉쌀하면서도 시원한 녹차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먹을수록 입맛이 돌아 누구라도 금세 밥공기를 비우게 된다. 깊은 바다의 맛과 깊은 산중의 맛이 이렇게 만난다.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던 나와 당신이 만나듯이. 만나면 서로 반갑듯이.

화정가든  보리굴비정식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