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런히 선을 긋고 또 그어 그림이 더디게 완성되는 사이 작업실 창밖은 초록으로 훌쩍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몇 해 전 처음 인연을 시작으로 통영에 갈 때마다 들르는 가게가 있는데 산양읍 삼덕삼거리에 있는 제씨상회입니다. 삼거리에서 박경리기념관 가는 길 초입에 있는 이 가게는 두 발로 걸어 세심하게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입니다.
바다내음이 그리 멀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 하루종일 햇살을 길게 드리운 황토색 가게가 청량하게 푸르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온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 따스함에 끌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제씨상회가 한 해를 넘기고 아카시아 향기 가득한 오월이 되어서야 완성되었습니다.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들이닥친 태풍 사라. 1959년 9월의 이 불청객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 태풍에 원래 있었던 가게가 떠내려가고, 맞은편 자리에 다시 지은 가게가 제씨상회입니다. 가게의 독특한 이름은 시어머님의 성씨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근대화 열풍으로 구멍가게 이름도 현대, 삼성, 금성, 선경 등등이 유행하던 시절, 제씨상회라는 이름에는 마치 밤나무골 김씨, 한사월 이씨, 평사리 최씨, 하오리 정씨처럼 씨족사회를 이루는 오래된 토박이 마을의 온정이 묻어납니다. 자리를 옮겨 새로이 문을 연 지도 60년이 다 되는 이 가게는 시어머님에 이어 며느리가 운영하고 지금은 주말마다 가까이에 살고 있는 따님이 어머니를 돕고 있습니다.
근방에서도 꽤 크고 번듯했던 이곳은 안채에서 음식 장사도 겸하면서 손님도 많이 드나들고 제법 장사가 잘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지척에 큰 마트가 생겼지만 매번 가게 안은 마실 나온 동네 손님들로 도란도란 정겨웠습니다. 단순히 물건만 파는 가게와는 다른 의미, 제씨상회가 지금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저도 가게 앞에 조용히 다가가 '제씨 아주머니!'라고 불러봅니다. 가게의 살구색 벽이 햇살에 비쳐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얼마 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4·27 판문점선언이 있었습니다.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눈부신 성장을 하였지만 분단국가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요. 이 땅에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문턱이 낮아져 교류라도 활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금강산 주변 어느 마을의 골목골목을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날을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