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다른 일로 전화를 걸 때마다 유홍준(69) 명지대 석좌교수는 들뜬 목소리로 "곧 '그 책'이 나온다"고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비롯해 숱한 베스트셀러를 낸 미술사학자이지만 이런 적은 드물었다. '그 책'이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한 권짜리 평전 '추사 김정희―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창비)다.

책이 나온 지난주, 유 교수는 무척 홀가분해 보였다. "드디어 독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추사 전기를 낸 겁니다." 그가 16년 전 출간한 3권 분량의 '완당평전'(학고재)은 그야말로 영욕(榮辱)의 책이었다. '첫 성인용 추사 평전'이란 찬사를 들으며 만해문학상도 받았지만 정민 한양대 교수, 고문헌 연구자 박철상씨 등으로부터 200건 넘는 오류 지적을 받았고 지금은 절판됐다.

‘추사 김정희’를 낸 유홍준 교수가 추사 글씨‘심석(心石)’이 쓰인 현판 앞에서 웃고 있다. 현판 왼쪽 작은 글씨는 '노완(老阮·늙은 완당)'이다. 손에 든 부채의 그림은 유 교수가 추사 작품을 모사한 난초도다.

그런데도 왜 다시 추사 책을 낸 걸까? "추사는 높은 산, 깊은 바다와도 같은 어마어마한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그냥 '명필'이 아니라 서화, 경학, 금석학, 선학(禪學)에 이르기까지 당대 동아시아의 최고봉에 올랐다는 것이다. 일본의 동양철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는 '청조학(청나라의 학문) 연구의 제1인자는 추사'라고 했고, 중국 학자 우리구(吳笠谷)는 '추사가 중국인이었다면 청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꼽혔을 것'이라고 했다. "추사는 당대 중국에서도 큰 명망을 쌓고 인기를 누렸던 '예술계 원조 한류 스타'였는데, 우리는 그걸 잘 모르지 않습니까?"

2000년대 이후 후지쓰카 소장품 같은 새로운 추사 자료들이 쏟아졌다. "'완당평전'을 절판시킨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동안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이제 칠순이 되고 보니 그 엄청난 자료를 토대로 개정판을 낼 시간은 없을 것 같고…." 그런데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을 위한 '전기문학'으로는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사의 생애를 600쪽으로 '압축'하고 새 자료와 받아들일 수 있는 오류 지적을 반영했다. 정민 교수에게 감수를 부탁했고, 자신을 비판했던 박철상씨 논문을 참고문헌 목록에 올렸다. 유 교수는 "또 말이 나오면 얼마든지 고치겠다"고 했지만, 박철상씨는 본지 통화에서 "학술서가 아니라면 굳이 지적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유 교수가 그린 추사는 '신산(辛酸)한 고난을 겪은 끝에 완성된 거인'이다. "젊어서는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했고 출세 가도를 달렸던 완벽주의자였지요. 하지만 세파에 휘둘리며 제주로, 북청으로 10년 동안 유배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추사는 '관용'의 미덕을 깨닫고 용산과 과천에서 궁핍하게 살면서 '평범'이란 미덕으로 귀의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산물이 추사체였다.

유 교수에 따르면 '난자완스처럼 기름기가 끼기도 하고 강철을 뚫을 듯하기도 했던' 추사의 글씨는 유배를 겪은 뒤 '힘 있는 골격과 울림이 강한 필획이 점차 천연스러운 고졸(古拙)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 추사가 최후의 4년 동안 '계산무진(谿山無盡)' '차호호공(且呼好共)' '판전(板殿)' 같은 걸작들을 쏟아내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그래서 숨 막힐 듯 깊은 울림을 준다.

노무현 정부 때 문화재청장을 지냈고 박근혜 정부 때 국립중앙박물관장에 뜻을 두기도 했던 유 교수는 "이제는 그동안 쓰지 못했던 책 집필에 전념하려고 한다"고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도 마저 써야 하고 '한국미술사 강의' 4권도 내야 하고…. 아이고, 이젠 공직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