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고려대 경영대학의 LG-포스코 경영관 건물 2층엔 '이명박 라운지'가 있다.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 'MB 라운지'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이 공간은 연일 잡음이 커지고 있다. 검찰은 9일 이 전 대통령을 뇌물수수와 조세포탈 등 16개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헌정 사상 네 번째로 형사법정에 서는 대통령이라는 불명예. 학교에서는 라운지 이름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기부한 사실 자체를 기리는 게 명명(命名)의 취지'라는 의견과 '고액 기부자라 하더라도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이명박 라운지'
'이 라운지는 이명박 교우님(경영61·서울시장)의 고귀한 뜻과 정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LG-포스코 경영관 건물 2층 벽면 한 모퉁이에 붙은 금빛 동판에 새겨진 문구다. 재학생들에게 이명박 라운지는 만남의 광장이자 쉼터로 통한다. 2개 층을 아우르는 통창이 있어 채광이 뛰어나고 인테리어는 미국 명문대학을 방불케 한다. 푸른색 카펫 위로 동시에 100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테이블 20여 개가 있지만 매번 자리 쟁탈전이 치열하다. 지난 10일 오전 찾은 라운지는 이른 시간임에도 과제와 조별 발표 준비에 여념 없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지상 6층 규모 3300평 넓이(약 1만890㎡)의 이 건물은 2013년 10월 준공됐다. 고풍스러운 외관에 첨단 장비를 갖춘 강의실 등 아시아 대학 최고 건물을 표방해 준공 당시 '기능적으로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보다 우수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LG와 포스코에서 100억원씩 후원했고, 어윤대 당시 총장과 경영대 출신 교우 170여명이 60억원을 기부해 공사비(총 260억원)를 마련했다.
'큰손' 중 한 명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1965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1억원 이상 10억원 미만 개인 기부자의 모임인 '고려대 크림슨 자유클럽'의 회원이기도 하다. 건물 준공 당시 경영대는 일정액 이상 기부한 교우 가운데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이름을 강의실과 세미나실 등에 붙인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즈음 이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으로 일하면서 청계천 복원사업 등 개혁적 조치로 정치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2층 한복판 볕이 드는 좋은 자리에 '이명박 라운지'가 들어섰다.
지난달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임박하자 학내 게시판에는 '이명박 라운지를 대체할 명칭을 공모해야 하지 않느냐'는 글들이 올라왔다. 구속된 후에는 '716 라운지(이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롱 섞인 표현도 보였다. 네티즌들도 관심을 보였다. 이명박 라운지가 그동안 홍보 책자와 영상에도 줄곧 등장하는 등 사실상 경영대를 상징하는 '얼굴'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 학교 경영대 졸업생 김모(28)씨는 "법원에서 유무죄 여부를 판단하겠지만, 이미 공개된 사실만으로도 이 전 대통령은 도덕적 귀감이 되기 어렵다"고 했다. 경영대 재학생 최모(24)씨는 "공과(功過)를 불문하고 이 전 대통령이 모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점은 별도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며 "건물을 기부받던 시점엔 자랑스럽던 동문이 하루아침에 경멸의 대상으로 변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오늘날의 잣대만으로 판단 불가해"
대학의 존립과 확장을 위해 자본 유치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시대. 대학가에선 비슷한 논란이 계속 있어왔다.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있는 상경관은 1996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상경대학 동문들의 기부금으로 지어졌다. 대우건설이 시공했고, '대우관(김우중기념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 회장이 세계 경영을 펼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대우그룹은 해체됐고,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 대출 혐의로 수사를 받던 그는 해외로 도피해 쫓기는 신세가 됐다. 학내 반발이 거셌다. 당시 상경대 학생회가 김우중관 명칭 변경을 위한 '연세인 마라톤 대회'를 열 정도였다. 그러나 명칭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영남대에선 박정희·박근혜 두 사람의 이름을 지우자는 움직임이 거세 교내에서 집회가 열렸다.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인용 결정을 내린 후였다. 박정희 새마을대학원이 표적이 돼 관련 예산이 삭감되는 등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고려대에선 최근 일부 학생이 중앙광장에 있는 설립자 인촌 김성수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2월 정부가 인촌이 1962년 받은 건국훈장 서훈을 56년 만에 박탈하고 나서부터다. 건물에 기부자 또는 대통령 등 유명 정치인의 이름을 붙이는 게 오래된 전통인 미국 대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있다. 2015년 8월 미국 텍사스대는 교내에 있던 제퍼슨 데이비스 전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했다. 학교는 "노예제 존치를 옹호했던 대통령을 기념하고 있다"는 학생들의 철거 주장을 받아들였다. 반면 비슷한 비난을 받아 온 미시시피주 펄리버대는 교내에 있는 '데이비스 기념관'의 건물 이름을 유지했다. '다양한 관점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였다.
과거 명명이 이루어진 사안에 대해 오늘날의 잣대만으로 판단하는 게 합당한가에 의견은 갈린다.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는 "건물이나 강의실에 이뤄진 기부자 명명은 학교에 대한 공헌 그 자체를 기념하겠다는 의미"라며 "지금 잣대로 단순히 없앤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공과는 평가하되 그 의미는 살려나가는 게 맞는다고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