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간 600개 홈런… "일본에서 고전 후 아기 사자에서 수사자 돼"
'나.36.이승엽' 자서전 출간, 이승엽장학재단 출범 동시에
"모든 선택은 스스로, 힘든 일은 항상 먼저 했다"

어릴 때부터 공 던지고 치는 게 좋아서 친구들과 나무 막대기 놓고 고무 공으로 맞추며 놀았다는 이승엽. 고교 졸업 후 삼성 라이온스에 입단, KBO리그 통산 홈런, 득점, 2루타, 1루타, 타점, 장타율 모두 최다기록을 달성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는 야구장에서 날아오르는 공을 보고 그 순간 ‘아! 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썼다. ‘인생 한방'으로서의 홈런, 떠오른 ‘야구공’은 보는 사람에게도 인생 반전을 꿈꾸게 한다.

그러나 곧 깨닫는다. 날아오르는 모든 것들은 그 비상의 아름다움만큼 정직한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단순히 공이 왔을 때 공을 치기 위해, 저 타자는 수많은 시간을 엉덩이를 모으고 스윙을 했겠구나. 저 공을 지탱하는 것은 두 팔의 힘이라기보다는 두 발과 엉덩이의 시간이겠구나.

23년 동안 600회가 넘는 홈런으로 국민들에게 행복감을 안겨주었던 이승엽. 은퇴 5개월 차 ‘전직 국민 타자’ 이승엽은 150일 동안 헬스클럽에 100일을 나갔고, 한 번도 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바빠서, 씻기만 했어요(웃음).” 전형적인 아저씨 몸매가 돼가고 있다고 그가 쌍꺼풀 진한 눈으로 웃었다.

얼마 전 그는 야구 인생 33년을 정리하는 ‘나. 36. 이승엽'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동시에 유소년을 위한 장학재단을 출범했다. 이승엽장학재단은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 마음껏 야구가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승엽 자신은 아이들을 위해 코치나 인생 상담 프로그램도 병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승엽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채 인터뷰 자리에 나타났다. 과묵해서 쉽사리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승엽의 입은 속사포에 가까웠다. 논리와 감성, 경험과 교훈이 적절하게 배합된 화술은 지금 당장 ‘자기 계발 강사'로 강단에 서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떤 상황에서나 몸값을 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선명한 프로 의식. 질문의 공을 던질 때마다 주저하거나 엉덩이를 뒤로 빼는 일이란 없었다.

이승엽야구장학재단이 4월 8일 출범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가장 먼저 재단에 1억을 기부했다.

평생 승부를 위해 살던 ‘공 앞의 사나이’가 남을 위해 살기로 결정했을 때, 그 풀어진 몸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생기에, 주변 사람도 광합성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프로야구 2군 개막식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국내 시즌에서는 한 번도 2군에서 뛴 적이 없지 않습니까?

“15시즌 동안 한 번도 없어요. 9년 동안 엔트리에서 빠진 적이 없죠. 그래서 저는 사실 2군 선수들의 고통을 몰랐어요. 야구는 그냥 하면 잘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일본에 가서 2군 생활을 길게 해보고야 알았어요. 내가 그 생활을 겪지 못했으면 내 야구가 깊이가 없었겠구나. 한국에서 야구를 오래 못했겠구나.”

-무슨 뜻입니까?

“2군은 정말 치열해요. 1군에서 뛸 수 있는 준비를 하고 거기서 또 잘해야 발탁돼서 1군으로 올라가요. 어마어마한 생존 경쟁입니다. 그게 너무 지치고 떠나고 싶지만, 그 생활을 모르면 세상을 반쪽만 아는 거죠.”

모두가 힘들던 IMF 시절, 이승엽의 홈런은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1999년 KBO리그 최초로 50홈런 시대를 열었을 때 그 열풍은 어마어마했다. 부러울 게 없었던 이승엽은 그러나 2004년 삼성 잔류와 메이저리그 진출 대신 일본을 선택해 대한해협을 건너갔다. 어찌 된 일인지 대한민국 4번 타자는 일본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머리카락 잘린 삼손처럼 긴 시간 부상과 부진, 향수병이 이어졌다. 일본의 지바 롯데,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릭스 등 3개의 구단에서 활약했던 8년의 기간 동안 1군과 2군의 체류 비율은 60대 40이었다.

“사십대에도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건 일본 무대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많은 걸 배운 덕분”이라고 말하는 이승엽.

-언제 처음 2군 통보를 받았죠?

“2004년 지바 롯데에서 성적이 안 좋았어요. 그때는 공이 너무 안 쳐져서 2군을 자원한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한심합니다. 평생 1군 무대도 못 뛰고 2군에서 은퇴하는 선수들도 많거든요. 제 결정이 교만했죠. 팀도 처음엔 불러서 “부진도 부상도 있으니 2군에서 조정하고 오라”고 부드럽게 배려하지만, 신임을 잃으면 매니저에게 그냥 통보가 와요.”

-결과가 수학으로 나오는 데이터 스포츠라 매번 승부에 촉각이 곤두설 것 같습니다.

“합법적인 선에서 무슨 수를 쓰든 이겨야 하는 세계죠. 프로에선 1등이 두 명일 수 없고, 친한 친구와도 실력으로 공존할 수 없어요. ‘이겨야 산다’라는 목적의식이 확고해야 합니다. 처음엔 친구와 같이 잘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감정과 승부는 구분되더군요. 어깨 두드리며 서로 격려해도 마음속엔 ‘저 친구가 못해야, 이 친구가 다쳐야 기회가 온다’는 생각이 생겨요. 그렇게 갈등과 번민이 다져지면서 강한 남자가 되는 거죠.”

-강한 남자라…

“원래는 여린 남자였는데 일본 생활하면서 좀 바뀌었어요. 아기 사자가 수사자가 됐죠(웃음).’

-정글의 서바이벌을 깨친 수사자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입니까?

“서글프죠. ‘남이 실수해야 기회가 온다’는 생각을 할 때 얼마나 쪽팔렸겠어요. 살아남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만큼 강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승부예요. 그래서 2군 선수들 보면 마음으로 응원을 해요. 모두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성장해서 1군으로 나아가라고.”

김영사에서 출간된 자서전 ‘나. 36. 이승엽'. 야구를 소재로 한 인생 수업이라 할만하다. 책의 수익금은 전액 이승엽 야구재단에 기부될 예정.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006년 정규 시즌 개막 전부터 4번 타자로 뛰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다시 호출을 받았지만 일본 동료 선수들이 ‘당신은 거인 군단의 4번 타자입니다. 나쁠 때도 좋을 때도 4번 타자입니다.’라고 쓴 감동적인 한글 편지를 건네주기도 했다. 성적이 좋을 땐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총애도 받았다. 하지만 2008년부터 손가락 부상으로 성적이 부진해지자 2년간 불편한 동거가 이어졌다.

당시에 그는 공이 겁나고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였다고 했다. “산을 넘어야 하는데 컴컴한 나무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심정이었어요. 2군으로 떨어져도 통상 열흘이면 다시 불려 나갔는데, 당시에 무려 102일을 머물렀어요. 자신감이 떨어지고 눈치를 보게 되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에요.”

-부상보다 무서운 게 멘탈이군요.

“맞아요. 그래서 언젠가 제가 지도자가 되면 잘하는 선수보다 기대를 받다 부진의 늪에 빠진 선수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려고요(웃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전혀요. 야구를 잘할 땐 더 큰 목표가 있어서 하고 싶었어요. 못할 땐 이렇게 끝낼 수 없어서 하고 싶었죠. 포기할 생각은 못 해봤어요. 사실 잘하면 시기 질투, 못하면 혹독하게 대우받는 존재가 외국인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야구장 갈 생각하면 우울해졌으니, 잘 될 리가 없었죠(웃음). ‘먹튀'다, ‘실패자’다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저는 8년간 진짜 많은 걸 배웠어요.”

청년 이승엽과 중년 이승엽. 언제나 내가 최고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과한 세리머니를 자제하게 됐다는 이승엽.

-그 와중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그때도 예선전에서는 부진했어요. 준결승, 결승전에서 홈런 하나로 모든 걸 만회했어요. 홈런 못 쳤으면 죽을 때까지 실패자 낙인이 찍혔을지도 모르죠(웃음). 기대가 크면 당연히 그 실망감도 크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든 저는 다만 한국 선수들과 뛰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당시 김경문 감독의 리더십이 탁월했지요?

“네. 당시 저는 연이어 삼진, 병살타를 당해서 괴로운 상황이었어요. 관중석에선 한국분이 “이승엽 빼라!”고 고함을 치고, 2:2 상황에서 타석에 나가기 전에 감독님을 쳐다봤어요. ‘제발 날 좀 빼주세요' 신호를 보내면서. 안 쳐다보시더군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원 스트라이크, 파울을 하나 친 상황에서 느낌이 반전됐어요. 보통 그 상황이면 자신감이 떨어져서 엉덩이가 뒤로 빠지는데, 스윙 감각이 살아났어요.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이거다’ 싶었죠. 2점 역전 홈런이 터졌어요.”

-결정적 순간에 홈런을 치면 어떤 기분인가요?

“말도 못 하게 기쁘죠. 부진했던 설움이 한 방에 날아가는 쾌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심리적 안정효과도 커서 결승전에선 첫 타석에서 또 홈런을 쳤습니다. 참가만 해도 기쁜 올림픽에 금메달을 땄으니 그 영광이 이루 말할 수 없죠. 감독님께 나중에 왜 그때 부진한 나를 안 빼주셨냐고 했더니 “4번 타자를 바꾸면 거기서 지는 거다" 그러시더군요.”

-‘인생 한방’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웃음).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게 야구와 인생이에요. ‘왜 내가 이런 불행에 처했나’ 자책하면 미궁에만 빠져요. 단순하게 ‘공이 오면 공이 친다' 그거에만 집중하면 훨씬 수월해요.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준비는 힘들게, 승부는 편하게'예요.”

-엄청난 연습 벌레로 알고 있어요. 경기가 끝난 후에도 새벽까지 스윙 200개 연습을 했다는 건 유명합니다.

“야구 선수라면 다 그렇게 할 거예요. 감각, 스피드, 궤도, 자세… 배트를 들고 섰을 때부터 공을 치고 끝날 때까지 가장 좋은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에 익히는 수밖에 없어요. 그냥 맹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집중력을 갖고서요.”

그렇게 연습을 하고 배트를 놓으면 손바닥이 다 벗겨졌다. 세수하면 마디마디 잡힌 굳은살이 얼굴에 사정없이 상처를 냈다. 생각해보면 야구 선수의 손은 발레리나의 발과 같다. 발레리나가 구황작물처럼 비틀어진 발가락으로 가볍게 날아오르듯, 야구 선수는 살이 벗겨진 손바닥으로 공을 비상시킨다.

IMF시절, 국민은 ‘코리안 특급’ 박찬호와 ‘홈런왕’ 이승엽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이승엽은 1976년 대구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해 1995년 처음 프로 무대를 밟았다. 데뷔 3년 만에 정규 시즌 MVP에 오른 뒤 1999, 2001, 2002, 2003년 통산 5차례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홈런, 득점, 2루타, 1루타, 타점, 장타율 모두 최다기록을 달성했다.

태어나서 처음 간 야구장에서 OB 베어스의 투수 박철순을 보고 반했던 7살 꼬마는, 13년 뒤 잠실구장에서 우상의 공에 홈런을 날렸다. 손바닥이 감전될 정도의 쾌감이었다. 하지만 어떤 날은 홈런을 치고도 고개를 숙이고 그라운드를 돌았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너무 젊은 투수의 공을 쳤을 때가 그랬다. 이승엽의 아버지는 강하고 엄했다. 잘 하는 선배보다 못하는 선배에게 깍듯이 하라는 건 절대명령이었다. 담배와 술을 원천적으로 차단했고, 혹여 재능에 도취될까, ‘건방지지 말라'고 혹독하게 정신을 단속했다.

-아버지에게 반항할 생각은 안 했나요?

“아니요. 저희 아버지 카리스마가 정말 대단하셨어요. 97년도에 첫 MVP에 홈런왕이 돼서 그 포상으로 차를 두 대 받은 적이 있어요. 한 대는 제가 타겠다고 말씀드렸다가 된통 혼이 났어요. 딱 한 마디 하셨는데 그 말이 정말 무서웠어요.”

-어떤 말이죠?

“건방지게! 그 한마디 말의 위력이 정말 컸어요. 99년도에 두 번째 MVP가 되고 나서야 제가 차를 갖는 걸 허락하셨어요.”

아버지가 그에게 운동선수로서의 자기 절제와 겸손을 가르쳤다면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만 베풀었다. 늘 안쓰러운 얼굴로 맛난 밥만 입에 넣어주셨다던 ‘엄마'는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다.

-은퇴식 때 울었던 건 어머니 때문이었습니까?

“네. 엄마는 진통제만 먹고 제때 병원엘 안 가셨어요. 제가 더 신경을 못 써드린 게 평생 후회가 돼요. 저도 중2 때부터 고3 때까지 부상으로 팔이 굽어서 하루도 안 빠지고 진통제를 먹었어요. 어머니가 그걸 고쳐보시겠다고 새벽마다 잠든 제 곁에서 전기찜질을 하셨어요. 지금도 팔이 완전히 펴지지 않아요. 결국, 투수에서 타자로 바꿨지만, 모든 과정에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제겐 큰 위안이었어요.”

지금도 우승했을 때나 은퇴했을 때나 그는 혼자 어머니 산소를 찾는다. 한 사람의 탁월한 ‘아웃라이어'가 탄생하기 위해선 1만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지만, 어쩌면 그 1만 시간 또한 오롯이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다.

-스승에게도 많은 빚을 졌다고요.

“백인천 감독님은 제게 방향을 제시해주셨어요. “어떤 선수가 될래? 홈런 타자? 아니면 안타를 많이 치는 타자?”라고 물으셔서 홈런 타자라고 했더니, 스윙 각도와 폼을 바꾸라더군요. 배트 위치를 높이고 더 짧고 강한 스윙으로 가라는 거죠. 100% 믿고 순종했고 바로 홈런왕이 됐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 기아 2군 감독으로 있는 박흥식 코치님은 형처럼 따뜻한 분입니다. 제가 다른 일로 마음이 다쳐서 성의 없이 훈련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장문의 편지를 직접 써서 주셨어요. ‘너의 그런 모습은 참모습이 아니'라는. 그때 반성해서 맘을 다잡고 99년도에 홈런 신기록을 깰 수 있었죠. 김성근 감독은 일본 지바 롯데에서 저의 재기를 만들어내신 분이에요. 정말 혹독하게 훈련시키셨어요. 제 생애 가장 많은 연습을 했습니다. 지금도 무서워서 얼굴을 못 쳐다봐요(웃음).”

-최근엔 투지와 인내를 의미하는 ‘그릿(Grit)'이라는 말이 천재성을 넘어서는 성취의 키워드로 주목받고 있어요. 만인의 사랑을 받는 ‘국민타자’가 된 비결을 뭐라고 보나요?

“(웃으며)제가 고집이 세요.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 의식도 뚜렷하고요. 비결이랄 건 없지만 전 항상 힘든 걸 먼저 해요. 100개 스윙을 해야 하면 그날 130개를 해요. 그러면 다음 날 70개만 하는 게 아니라 150개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런 날들이 쌓여 하루에 300개 스윙을 하는 저를 발견하는 거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만족감이 쌓여갔어요. 그런데 제 아들에게도 숙제를 먼저 하라고 했더니 힘들어하더군요(웃음).”

겸손과 절제의 아이콘 이승엽. 그는 항상 자신에게 혹독했고 그라운드에선 긴장했다.

-한번 노력할 수는 있지만, 그 노력이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인간인데 나태해질 때가 왜 없겠어요(웃음). 그런데 그런 저를 질책해주시는 분들이 곁에 있었어요. 삼성에 복귀해서 2013년에 부진했어요. 그 전년도에 성적이 좋아서 ‘한국 야구는 쉬워. 안 해도 잘 할 거야' 자만을 했더니,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더군요. 그때 유중일 감독님이 불러서 “너 왜 요즘 열심히 안 하냐?”고 호통을 치셨어요. 김성근 감독도 일본에서 “열심히 안 하면 배트 놔야지"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고.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리끝이 쭈뼛거려요. 정신을 차리고 다시 2시 연습이면 1시에 나오고, 공과 배트를 정성껏 닦았어요. ‘승엽아! 오늘도 잘해보자' 혼자 중얼거리면서요.”

-프로로 23년간 해보니 야구가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야구만큼 단순하고 깊이 있는 스포츠가 또 없어요.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타석에 들어서면 쉬워요. 이 투수가 나에게 어떤 공을 던질까. 공만 보고 공을 치면 되는 거죠. 그런데 투수와 머리싸움을 하고 볼카운트를 신경 쓰고, 스코어와 주자를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 늪에 빠집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인 거죠. 거두절미하고 ‘직구가 오면 이렇게, 변화구가 오면 이렇게’만 생각하면 됩니다. 같은 맥락으로 후배들에게도 말합니다. 아마추어는 과정만 생각하고 프로는 결과만 생각하라고.”

-장르 불문 결과만 요구하는 세상입니다만.

“프로는 결과를 못 내면 집으로 가야 합니다. 아마추어는 달라요. 초중고 시절에 이기는 방법만 배우고 기본기를 못 배우면 정작 프로에 와서 오래 못가고 망가집니다. 결과만 생각하다 꿈을 못 이루고 하차하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은퇴를 생각한 건 2011년 즈음이었다. “오릭스에서 2년 연장 계약을 하면 2013년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삼성이 다시 나를 부르고 기적처럼 다시 기회가 왔어요. 결국 42살에 은퇴했으니 5년을 보너스로 더 얻은 셈이죠.”

-야구를 안 했으면 무엇을 했을까요?

“야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됐겠죠, 퇴근하면 매일 야구장에 가는(웃음). 제 인생에서 야구를 빼면 10% 정도밖에는 안 남아요. 지금도 은퇴했지만, 야구 경기를 보러 가요. 초등학교 때부터 과학자, 소방관, 대통령이 아니라 야구 선수를 꿈꿨어요. 33년간 정말 신나게 꿈을 꿨어요.”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 승부가 있나요?

“2002년 한국 시리즈 2차전이요. LG와 9회 말 동점에서 3점 홈런을 쳐서 한국 시리즈 첫 우승을 했어요. 2003년 56호 홈런을 쳐서 아시아 신기록을 냈을 때도 기억나요.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전 역전 홈런을 날렸을 때입니다.”

-가장 뼈아픈 실패의 기억은?

“2008년 일본 재팬시리즈예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총 7경기에 나가서 겨우 안타 2개를 쳤어요. 패인이 저라고 생각해서 정말 괴로웠어요.”

-몸값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평생 짐이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겪는 스트레스와는 비교가 안될 텐데요.

“박수도 비난도 다 감당해야죠. 부담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행복한 인생이었습니다.”

-타석에 서서 극심한 압박감이 몰려올 땐 어떻게 대처했나요?

“가족을 위해서 팀을 위해서, 팬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저 공을 치자'라고 생각해요. 저는 철저히 저를 믿었어요. 압박감이 심할 땐, 잘했을 때의 상황과 못했을 때의 상황을 그려봐요. 9회 말 2아웃에 2:1로 지고 있을 때 내가 저 공을 치면 스타가 되고, 아니면 역적이 된다…(웃음). 후배들한테도 어떤 행동을 할 때 겁이 나면 그 결과를 미리 그려보라고 해요.”

중년의 얼굴, 소년의 웃음, 이승엽.

-책에서 “야구는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나의 운을 젊은 선수들에 게 물려줘야 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요?

“기회를 줘야죠. 부상 때문에 2군에 가서 많은 걸 봤어요. 정말 열심히 하는 친구도 기회가 없어서 자포자기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어요. 저는 못 해본 거 없이 다 해봤어요. 이제는 뒤로 빠져서 그들에게 기회를 줘야죠. 지난해 은퇴 시즌에도 몇몇 경기는 제가 빠지고 후배들에게 기회를 줬습니다.”

-은퇴할 때는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남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은퇴 투어도 하고 은퇴식도 했어요. 자부하건대 우리나라 역대 야구 선수 중 제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어요(웃음).”

삼성 라이온즈는 이승엽이 달았던 등 번호 36번을 명예의 넘버로 비워두기로 했다. “36번은 인기 없는 번호였어요”라고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10번, 11번, 27번을 좋아했는데 다 선배들이 달고 계셔서 어쩔 수 없이 36번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번호를 달고 MVP도 되고 홈런왕도 되고 보니, 운명의 번호가 되더라고.

-라이벌은 누구였나요?

“저 자신이요. 오로지 저의 나태와 자만과 싸웠습니다.”

그는 살면서 모든 결정을 다 스스로 내렸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단식 투쟁을 거쳐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이후로 고교 시절 대학 진학 대신 프로 구단에 입단한 것도, 메이저리그를 뒤로하고 일본으로 간 것도, 다시 삼성으로 돌아와 2017년 은퇴를 한 것도. 다른 사람 말을 듣고 결정해서 실패하면 그 사람 탓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인생에 ‘허튼 시간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치열하지만, 낙관적인 싸움이었다.

이승엽은 40세에 2015 타이어뱅크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42살에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은퇴했다.

-홈런왕 이승엽, 국민타자 이승엽이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참을 생각하다가)야구장에 가면 스무 살이든 마흔 살이든 다 똑같아요. 후배들은 선배들보다 더 노력해서 따라잡겠다는 마음뿐이고,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마음뿐이죠. 노력은 나이를 이길 수 있어요. 무슨 일이든 포기만 하지 마세요. 잘 되고 안 되고는 모든 게 끝났을 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2008년 2군의 고통 속에 선수 생활을 끝냈다면, 만약 그가 2013년 국내 복귀 후 ‘한물갔다’는 야유를 받았을 때 선수 생활을 끝냈다면, 이승엽의 1막 2장은 달라졌을 것이다. ‘나쁠 때도 좋을 때도 당신은 4번 타자!’라던 일본 동료 선수들의 편지는 빈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