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증명서 떼러 왔는데요."
"(인질극)사건 때문에 안 되는데…에이, 얼른 다녀 오세요."

서울 방배초등학교에서 초등생 인질극이 발생한 지 하루 뒤인 지난 3일에도 안전불감증은 여전했다.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 기동팀이 이날 오전 서울·경기 일대 초등학교 15곳에 진입을 시도했다. 12개 초교에서 무사통과였다. 방배초 인질극을 벌인 양모(25)씨처럼 “졸업증명서 떼러 왔다”고 말해보기도 했다. 무사통과였다.

지난 2일 서울의 한 초등학교 등굣길 모습. 기자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행 학교안전 표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학교 방문객은 신분증을 제출하고 출입증을 받아야만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돼 있다. 교직원이나 학부모도 예외는 없다. 그러나 무사통과 초등학교 12곳 가운데 절반(6곳)이 “서류 떼러 왔다” “조카 준비물 주러 왔다”는 말만 믿고 교내로 들여보냈다. 신분증 확인조차 없었다. 나머지 4개교(校)는 학교보안관이 ‘낯선 외부인(기자)’을 멀거니 쳐다 봤다. 교문→운동장→교무실까지 가는데 뒤에서 한번 부르지도 않았다. 그나마 2개교는 등교시간인데도 학교 보안관이 보이지가 않았다. 역시 무사통과였다.

◇학교 보안관이 있어도 없어도 '무사통과'
지난 2일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양씨는 '세상과 투쟁하라'는 환청을 듣고 모교(母校)인 방배초로 향했다. 오전 11시 40분쯤 학교 보안관은 "졸업증명서 떼러 왔다"는 말 한마디에 교문을 활짝 열었다. 신분증 확인은 없었다. 곧장 교무실로 걸어간 그는 교무실에서 이 학교 4학년 여학생을 낚아챈 뒤 20cm 길이 흉기로 위협했다. 사건은 속보로 타전됐고, 직장에 있던 학부모들이 학교로 달려오면서 학교 일대에 소란이 일었다.
하루 뒤인 지난 3일 오전 10시쯤 기자가 서울 서대문구 A초등학교를 찾았다. 학교보안관이 자리를 비우고 없어서 기다렸다. 뒤늦게 학교보안관이 나타났다.

"어떻게 오셨어요?"(학교보안관)
"졸업증명서 떼러 왔어요."(기자)
"어제 인질극 뉴스 못 보셨어요? 신분증 주셔야 하는데…"(학교보안관)
"깜빡 했어요."(기자)

대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기자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 교내 화장실 앞까지 갔다가 다시 교문을 통해 빠져 나왔다. 경기 김포시 B초등학교는 ‘인질극’ 거론도 하지 않고 기자를 들여보냈다. 학교보안관은 “신분증 없으시면 졸업증명서 못 뗄 것 같은데”라면서 기자를 통과시켰다. 아무런 신원확인 절차가 없었다.

지난 2일 김포에 있는 한 초등학교 교실 입구의 모습. 이날 기자는 아무런 제지없이 학생들이 모여있는 교실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같은 날 오전 경기도 안양시 C초등학교 앞에서 만난 학부모들은 “불안해서 못 살겠다”고 한숨 쉬었다. 등굣길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걱정스런 마음에 아이를 하루 쉬게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할 만큼 불안했다”며 “학교측에서 외부인 출입 제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자가 C초등학교에 진입을 시도했다. 교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학교 보안관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일단 교내에 진입했다. 교실이 있는 학교 건물 1층부터 5층까지 모든 교실을 다 돌아다녔다. 1층 중앙로비에서 우연치 않게 학교 보안관을 마주쳤지만 “O학년 O반에 준비물 주러 왔다”고 하니, “알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경기도 김포시의 D초등학교도 정문 앞에 ‘외부인 출입을 금지한다’는 큼지막한 표지판이 있었지만 학교보안관이 보이지 않았다. 기자가 교내에 진입한 뒤 다시 나올 때까지 보안관은 자리에 없었다.

절차대로 하는 학교가 더러 있었다. 기자가 찾은 15개교 가운데 3곳이었다. 서울 마포구 성산초등학교는 정문을 지나치려고 하자 학교보안관이 곧바로 제지했다. “조카 준비물 주러 왔다”고 둘러댔다. “조카의 이름, 학년, 반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규정상 들어갈 수 없으니 제게 맡기면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성산초 정길상(63) 학교보안관은 “아이들 안전을 위해서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다”며 “매년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보안교육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서교초등학교, 성동구 금북초등학교도 역시 학교보안관이 “신분증이 없으면 출입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고 했다.

◇ 보안관만의 문제아냐, 법적 근거 마련 필요
외부인이 학교에 들어가 학생을 위협하고 범죄로도 이어진 사건은 그간 여러 차례 발생해왔다. 이른바 '김수철 사건'로 불리는 사건이 대표적이다. 2010년 김수철(53) 은 서울 영등포구 한 초등학교로 들어가 당시 1학년 여학생을 자신의 집으로 끌고 들어가 성폭행했다. 그가 아무런 제지 없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CCTV에 잡혔다.

2012년 서울 서초구 계성초에서는 우울증을 앓는 고교 중퇴생 김모(당시 18세)군이 수업 중인 교실에 침입하는 일이 발생했다. 김군은 당시 학급 회의를 하던 학생들에게 야전삽을 겨눴다. 김씨도 ‘무사통과’였다.

사고의 원인을 ‘학교 보안관’ 문제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 서울시 562개 국·공립초등학교는 1187명의 학교 보안관을 두고 있다. 학교마다 최대 3명까지 학교 보안관을 둘 수 있다. 그러나 비용 등의 문제로 대부분 학교에서 1~2명의 학교 보안관을 두고 있다. 일부 학교는 1명의 보안관이 정문을 지키는 동시에 순찰도 해야 하는 것이다. 보안관 응시연령이 만 55~70세 사이로 비교적 고령인 점에 불만을 갖는 학부모도 일부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외부인 출입에 대해 보다 엄격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초등학교 보안관은 “하루에도 외부인 수십 명이 학교를 방문하는 상황에서 의심이 간다고 무턱대고 신상을 캐묻기도 곤란하고 학부모인 경우 기분이 나쁘다며 학교측에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최미숙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학사모) 대표는 “학교를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 부처 출입을 하는 것처럼 강제적으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방배초 인질극을 계기로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상돈 교육부 학교생활문화과장은 “(학교 출입과 관련한) 표준 가이드라인이 학교에 배포돼 있는데, 학교들이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매뉴얼에 문제가 없는 교육청과 공동으로 확인할 예정”이라며 “단기적 조치할 수 있는 부분은 실행하고 인력 등 장기적인 부분은 계획을 세워 보완해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