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전남 순천시 향동 장안창작마당 뒤뜰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모습. 40년이 넘은 원도심 삼겹살집은 주민을 위한 문화예술복합 공간으로 변신했다.

지난달 26일 오전 전남 순천시 향동 문화의 거리. 이곳 '장안창작마당' 1층 장악부엌은 쑥향이 가득했다. 순천YWCA(기독교 여자 청년회) 사회개발위원회 회원 8명이 쑥과 쌀가루, 콩을 한데 버무려 찌는 쑥버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요리학원 수준의 주방에서 모두 점심 준비에 분주했다. 개수대에서 쪽파를 다듬던 신성의(54) 순천YWCA 사무총장은 "여기서 소그룹 회의도 하고 각자 준비해 온 음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며 "남은 식재료는 '공유냉장고'에 넣어 다른 주민과 나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날 삶은 계란과 미니토마토, 쑥버무리, 파전 등을 기다란 일자 테이블에 올려놓고 여유로운 점심을 먹었다. 조금 전 머리를 맞대고 회의했던 테이블이 식탁으로 변했다.

순천시가 지난해 7월 원도심 한복판에서 개장한 문화복합시설 장안창작마당은 언제나 누구든지 무료로 빌려 이용하는 '열린 공간'이다. 장악창작마당을 관리 대행하는 김도혁 ㈜앨리스 기획팀장은 "마을에 근사한 사랑방이 생겼다고 반기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주민이 주도, 주민을 배려하는 마을재생

순천 도시재생의 가장 큰 특징은 '주민이 주도' '주민을 배려' 이 두 가지 철학을 실천하는 점이다. 주민은 각 도시재생 사업의 계획 수립과 명칭 결정, 공사 시기, 운영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다.

주민 참여형 사업 중 대표적인 것이 장안창작마당 건립이다. 이 건물은 40년 된 고깃집이었다. '장안정육점·식당' 간판을 달고 오랫동안 지역민에게 사랑받는 삼겹살 전문점으로 유명했다. 순천부읍성 성곽 안에 자리를 잡아 '장안'이라는 이름을 걸었다고 한다. 40년 넘게 주민과 동고동락한 끝에 향동의 고유 자산이 됐다.

앞서 시는 2층짜리 식당 건물을 사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식당을 어떻게 고칠지 계획 수립부터 명칭 공모, 운영 프로그램 마련 등 모든 과정에서 주민의 뜻을 반영했다. 주민들은 "장안식당의 원래 이름을 살리자"며 장안창작마당이란 명칭을 결정했다. 오래된 벽돌과 간판도 그대로 사용했다. 고기를 팔던 식당 건물과 뒤뜰은 이제 장안부엌, 장안공방, 장안여인숙, 전시공간(갤러리이층), 입주작가 숙소로 재탄생했다.

'혼자 먹기엔 너무 많거나, 버리기엔 아까운 음식들은 공유 냉장고에 채워주세요.' 장안부엌 내 작은 냉장고 칠판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시민의 기부만으로 운영하는 냉장고 안에는 과일, 양배추, 된장, 음료수, 계란, 장아찌 등이 들어 있었다. 주민이 자발적으로 음식재료를 들고 와 음식을 해먹고 남으면 다른 주민을 위해 넣어 두고 간다. 조태훈 순천시 도시재생과장은 "푸성귀라도 이웃과 정을 나누는 공동체 문화가 장안부엌에서 되살아났다"며 "우리 사투리에 '함께'라는 뜻의 '항꾸네'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창안창작마당에서 어린이 창작 목공소 수업이 있는 날 아이들은 먹을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온다. 음식 봉다리가 목공소 교육 참가비. 공유냉장고에 음식을 기부하고 가족과 함께 목공 수업을 듣는 '봉다리학교'가 열리는 것이다. '장안공방'에선 시가 마련한 고가의 목공기구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가구를 만들 수 있다.

식당 안채는 '장안여인숙'으로 개조했다. 2인 1실의 방 3개를 갖췄다. 숙박료는 없다. 타지 사람만 숙박이 가능하고, 순천 여행의 감상을 글과 사진 등의 창작물로 내야 한다. 최소 2박 3일에서 최장 9박 10일까지 머물 수 있다. 식당 2층에는 작가 세 명이 시 지원을 받아 입주해 거주하면서 순천을 홍보하는 창작활동을 하고, 이를 2층 전시실에서 전시한다. 또 장안창작마당 뒤뜰 잔디밭에선 다양한 문화 공연이 열린다. 황학종 순천시 도시재생팀장은 "주민이 여기서 다양한 문화예술을 경험하면서 일상의 작은 여유를 발견한다"며 "문화와 사람이 결집한 선순환의 에너지가 마을 일상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장안창작마당 프로그램은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 주관 '2017 도시재생 한마당 주민참여 프로그램 경진대회'에서 종합대상을 받았다.

1. 청년창업점포 ‘온뜨레’ 대표 김수진씨가 판매용 전통공예품을 들고 있다. 2. 순천시는 옛 지도와 지적도를 바탕으로 700년 골목길을 재현했다. 주민의 요구에 따라 차량 통행이 가능하게 골목길 폭을 넓혔다. 3. 순천 향동 청수정마을 주민들이 세운 청수정 카페. 주민들이 운영하는 이 카페는 100년된 한옥을 고쳐 만들었다.

주민이 신뢰하는 마을재생

주민의 믿음을 얻는 것이 도시재생의 원동력이었다.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 공용주차장, 청년점포 등의 사업을 추진하면서 주민 신뢰가 쌓였다.

향동에서 지난해 12월 문을 연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는 건물 길이가 70m에 달한다. 공동화 당시 마을 주민의 평균 나이 70세를 상징한 수치다. 1층 건물 높이는 3.65m. 사람의 체온을 뜻한다. 애초 건물 높이가 7m라 순천부읍성 성벽 안과 밖을 정서적으로 가른다는 주민의 반발을 샀다. "건물이 너무 높아 답답하다" "사생활을 침해한다" 등의 의견이 나왔다. 이런 주민 의견을 듣는 데만 1년 6개월이 걸렸다. 수렴한 주민 의견을 설계에 반영했고, 지금은 이 건물을 주민이 스스로 운영한다.

시는 향동 뒷산인 남봉산 계곡물을 끌어다 폭 60㎝, 길이 150m 규모의 도심 인공하천을 만들었다. 인공천은 서문안내소 앞에서 매산고 방향으로 구불구불 흐른다. 주민을 위한 배려다. 매산고 앞 공터는 애초 국민행복주택 부지라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시는 아파트는 경관을 헤친 데다 도시재생과도 동떨어진다고 판단하고 주민이 절실하게 원하는 공용주차장(109면)을 조성했다. 옆에는 주민이 한데 모이는 바닥분수 광장을 만들었다. 올여름부터 바닥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나온다.

중앙동 '아웃도어룩(등산복) 거리'는 요즘 '보세의류 거리'로 불린다. 지난해 1월 광양에 호남 최대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2016년 말 아웃도어룩 가게가 대부분 떠나 27개 가게 중 15개가 비었다. 아웃도어 열풍이 식은 점도 작용했다.

요즘은 빈 점포가 사라졌다. 청년 창업촌(청년창업 챌린지숍)이 지난해 4월 생겼기 때문이다. 순천시가 원도심 빈 점포를 활용해 청년 창업기반을 조성하는 '청년창업 챌린지숍' 프로그램에 10개 신규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시는 업체별로 최대 2년까지 초기 개조 비용 50%와 월 임대료 60%를 지원한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청년들이 찾아와 장사하며 상가 거리가 활기를 띠자 일반 보세의류점이 잇따라 들어섰다. 시장 전체에 훈기가 돌자 중앙동 상인들은 이제 청년들에게만 특혜를 준다는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 '온뜨레' 가게를 개점한 김수진(40)씨는 청년 점포 모임 '청년100' 회장을 맡고 있다. 김씨는 "청년의 100도 열정으로 100개의 청년 점포를 만들어 보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온뜨레는 모든 뜰에 향기와 꽃을 피워 이름을 널리 알리겠다는 의미. 특수 가공해 물이 없어도 시들지 않는 생화(프리저브드 플라워) 판매와 특이 음료, 전통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식용 장미를 넣은 장미에이드 신메뉴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김씨는 "우리 청년만 살고자 하는 게 아니라 지역 상권과 상생하고자 한다"며 "유동 인구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외지인을 끌어모아야 한다. 청년100 점포가 앞장서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