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30)가 1박 2일 연장 혈투 끝에 올 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첫 메이저 대회인 ANA 인스퍼레이션(미국 캘리포니아 미션힐스 골프장)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박인비는 3일(한국 시각) 열린 대회 8차 연장전에서 파를 기록하며, 버디를 적어낸 페르닐라 린드베리(32·스웨덴)에게 패했다.
이 경기는 원래 하루 전에 끝날 예정이었다. 박인비와 린드베리, 그리고 재미교포 제니퍼 송이 공동 선두를 이루며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1972년 대회 창설 이후 3명이 공동 선두(15언더파 273타)로 연장전을 치른 것은 처음이었다. 제니퍼 송이 3차 연장에서 파로 탈락하고, 현지 시각 1일 오후 7시 6분 해가 진 상황에서 4차 연장에 접어들었다. 이동식 전등과 스코어보드로 이용된 전광판만이 그린을 밝힌 채 4차 연장전을 치렀으나 박인비와 린드베리 모두 파를 기록했다.
승부는 한국 시각 3일 0시 재개됐다. 추가 4차례의 연장 끝에 박인비는 메이저 8승과 통산 20승 달성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게 됐다. LPGA 투어 메이저 대회가 현지 시각 월요일에 우승자를 정한 것은 2011년 US오픈 이후 7년 만이다. 전날 4차 연장전이 끝난 후 린드베리는 "박인비는 역사상 최고 여성 골퍼 중 한 명이다. 박인비를 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만큼 잠을 푹 자고 경기에 나서겠다"고 했다. 결국 린드베리는 그 꿈을 이뤘다.
박인비는 이 대회 전까지 커리어 그랜드 슬램(4대 메이저 대회 모두 우승)과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명예의 전당 헌액까지 이뤘다. 골퍼로서 사실상 더 이룰 게 없었다. 최근 몇 년간 잦은 부상으로 은퇴를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했던 박인비는 이번 대회에 욕심을 부렸다. 그는 대회 전 "아빠가 메이저 중 이 대회에서만 2013년 우승 때 그 자리에 없었다"며 "'갤러리 그랜드 슬램'을 해보고 싶은 아빠를 위해 또 다시 우승하고 싶다"고 했다.
박인비는 이날 아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박인비는 이 대회에서 '레전드의 품격'을 보였다. LPGA 투어 경쟁자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침묵의 암살자'의 면모를 보였다. 2주 전 파운더스컵에서 우승컵을 든 박인비는 2라운드를 선두에 7타 뒤진 공동 11위로 마쳤으나 조급한 기색 없이 3라운드에서 5타를 줄여 공동 3위로 점프했고, 기어코 공동 선두로 4라운드를 마쳤다. 최종 라운드에선 16번 홀(파 4) 보기로 선두그룹에서 밀려났으나 곧바로 17번 홀(파3)과 18번 홀(파5) 연속 버디로 공동 선두가 됐다.
연장에서 이전까지 한 번도 LPGA 투어에서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던 두 경쟁자는 압박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린드베리는 페어웨이에서 자신의 샷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듯 두 개의 아이언을 들고 고민하거나 어드레스에 들어갔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제니퍼 송은 굳은 표정으로 연신 물을 들이켰다.
반면 박인비는 어드레스를 한 뒤 지그시 목표를 두 번 바라보고 지체 없이 샷을 날렸다. 예외가 없었다. 티샷이 벙커에 빠져 두 발을 러프에 올려놓고 샷을 하거나 세 번째 샷이 그린 옆 워터 해저드에 빠질 뻔한 상황(2차 연장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인비는 "선두에 뒤지다 마지막 연속 버디로 연장에 가게 된 것에 감사한다"며 "내가 원하는 플레이, 내가 원하는 샷을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금 자리에 안주하기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박인비의 자신과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