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노란 날' 등굣길 표정
미세먼지 영·유아에 악영향 연구결과
학부모 "이민 고려" "둘째 포기" "죄인 된 심정"
미세먼지 재난에 가까워도 '휴교' 어려운 구조
"선생님 말씀 잘 듣고...마스크 잘 써. 그리고 절대로 밖에 나가서 놀면 안 돼."
박향숙(46)씨가 신신당부하자 초등학생 아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27일 오전 8시30분쯤 서울 마포구 공덕초등학교 등굣길에서는 곳곳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초등학생보다 더 어린 유치원생들도 이날 등원했다. "마스크 안 쓸래"라고 떼쓰는 아이 손을 잡고 약국으로 가거나, 차에서 내려 곧장 학교로 달리는 학부모도 있었다.
여분의 마스크를 아이 가방에 쑤셔 넣고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한참 서 있는 엄마들이 많았다. 아이들 뒷모습이 뿌연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날 오전 서울 미세먼지 농도는 ‘나쁨(106㎍/㎥)’을 기록했다. 전날 미세먼지 농도는 이보다 더 안 좋은 137㎍/㎥. 이틀째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미세먼지가 걱정되는 학부모는 ‘자체 결석’ 여부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화(41)씨는 다섯 살배기 쌍둥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유치원에 데려왔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박씨가 입을 뗐다. “겨울에서 추워서 이거(유모차 커버)를 못 뗐는데, 봄이 되니까 이제는 미세먼지 때문에 이러고 있네요.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올지 고민했는데. 그래도 (유치원에) 공기청정기가 있어서 데려왔어요.” 유모차 커버 속에서 쌍둥이 눈만 빼꼼히 보였다. 둘 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학교 보내는데 죄인 된 심정"...애끓는 학부모
환경 당국은 "고농도 미세먼지(미세먼지 나쁨 이상)가 발생할 때 '무리한 실외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행동요령을 제시하고 있다. 이 행동요령이 학부모 애를 태운다. 학부모 김남희(37)씨는 "이런 날이면 운동장에서 체육활동을 안 한다지만 등·하굣길이 걱정이고, 수업시간 외에 전교생을 모두 실내에서 통제하는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26일처럼 미세먼지 주의보(미세먼지 2시간 이상 150㎍/㎥ 또는 초미세먼지 2시간 이상 90㎍/㎥)가 발령되면 영유아·학생·노인은 실외활동을 금지해야 한다. 대부분 초등학생들은 그래도 학교에 갔다.
만약 미세먼지 경보(미세먼지 2시간 이상 300㎍/㎥ 또는 초미세먼지 2시간 이상 180㎍/㎥)가 발령되면 환경부가 휴업을 권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성이 없다.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돼도, 교육감이나 학교장 재량으로 휴교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서울 미세먼지 농도가 나흘 째 '나쁨'을 기록하면서 일선 학교에는 "휴교 안 하느냐"는 학부모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마음 급한 학부모들은 팔 걷고 나서기도 한다. 이들은 합심해서 교육부·환경부·보건복지부 등에 "미세먼지 농도 '나쁨'에는 휴교령을 내려 달라" "학교에 미세먼지 측정기와 공기청정기를 설치해 달라"는 민원 1만여 건을 접수하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도 목소리를 내는 통로가 되고 있다. '미세먼지의 위험, 중국에 대한 항의'라는 제목의 청원에는 이날 오후 2시 현재 12만8000여명이 동참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김지연(가명·36)씨는 고민 끝에 ‘자체 결석’하기로 했다. 김씨는 “학교가 병결 처리를 안 해주고 진단서, 투약봉투 등을 가져오라고 한다”면서 “무단결석을 해버릴지 병원 진단서를 떼어갈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구명은(30)씨는 공기청정기 있는 유치원을 하나하나 따져보고 있다. 4살 아이를 둔 석지혜(40)씨는 “엄마 입장에서는 절실한 문제”라면서 “미세먼지가 심할 때 휴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세먼지가 영·유아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학부모들이 전전긍긍하는 이유다.
바르셀로나 글로벌보건연구소에 따르면 어릴 때 미세먼지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뇌 발달과 기억력 등 인지기능발달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 국제학술지 환경보건전망에 제출된 보고서에서도 미세먼지는 '자폐스펙트럼장애'(ASD)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교육부 미세먼지 매뉴얼에도 "영·유아, 어린이는 체중 당 호흡량이 성인보다 높아 더 많은 미세먼지를 마신다"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사정이 이러니 “이민을 가겠다” “아이 낳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나온다. 이영은(33)씨는 미세먼지 사태를 정부가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생각 끝에 진지하게 이민절차를 알아보고 있다. 권민지(36) 씨 얘기다. “이렇게 온통 하늘이 노란 날 학교 보낼 때마다 죄인이 된 것 같은데...둘째 낳을 생각이 싹 가십니다.”
◇프랑스 미세먼지 '나쁨'에 휴교하는데... '미세먼지 경보'에도 출석 강요하는 대한민국
교육당국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 야외활동을 줄이라고 권하거나, 봄 운동회를 가을로 옮기는 정도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미세먼지로 인해 휴교한 학교는 단 한 곳도 없다. 휴교 기준이 까다로운 까닭이다. 프랑스에서는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80㎍/㎥)'수준이면 휴교하지만, 한국에서는 '매우 나쁨(151㎍/㎥ 이상)'이어도 출석해야 한다.
미세먼지가 재난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휴교’를 결단 내리기가 어려운 구조다. 미세먼지 경보가 떨어지면 교육감·학교장은 휴교령을 고민할 수 있지만 반대여론과 수업일수를 따지면 쉽사리 결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되어도 야외수업 자제, 수업단축만 시행하는 학교가 많다. 교육부 관계자는 “갑자기 휴교를 하면 학부모도 부담스럽고, 수업일수에 문제가 생긴다”며 “폭설, 지진과는 달리 미세먼지는 지역별·시간대별로 상황이 다르다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지자체도 ‘뒷북 대응’만 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미세먼지 ‘나쁨’ 상태가 사흘 째 접어든 지난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미세먼지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나빠지면, 서울시교육청과 협력해 휴교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서울시교육청도 뒤늦게 미세먼지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교육시설 내 공기 정화시설 구비도 미흡하다. 최도자 바른미래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어린이집 17만8185개 보육실 가운데 공기정화장치가 설치된 곳은 10만7613개(60.4%)였다. 초등학교 공기정화장치 설치율은 33.6%,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18%에 불과했다. 초등학생 아들을 둔 강지혜(37)씨는 “괜히 나섰다가 ‘오버한다’고 할까 봐 자제하고 있지만 교실에 내 돈 들여서라도 공기청정기를 놓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대부분의 초·중·고교는 공기정화장치 지원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초등학교 교사 김모(33) 씨는 “이미 예산이 확정돼 당장 공기청정기를 구매할 수 없다”면서 “현재로선 공기청정기 관리비 파악도 안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교육당국은 예산 문제가 걸려 있는 만큼 공기청정기 설치 문제는 시간을 들여 신중히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